대전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이사를 자주 다니지 않고 한 동네에서 이십 년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그때까지 내 삶은 대전 변두리의 작은 동네에 머물러 있었다. 크고 화려한 도시, 서울을 동경했고 운 좋게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있었다. 대학 생활은 드라마에서 보던 사랑이 꽃피고 낭만이 넘치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입시 경쟁에 억눌린 욕구를 분출하게 된 곳은 생각지도 않은 사진 동아리였다. 공부는 등한시하고 사진기 둘러메고 집회 현장이나 파업 현장, 철거 촌 같은 데를 쫓아다녔다.
고향 집에 내려가기 위해, 터미널에 가면 늘 마음이 복잡했다. 부모님을 뵙기가 영 떨떠름했다. 부모님의 기대와 다르게 사는 것이 면구스럽기도하고 나를 이해하시지 못하는 게 답답했다. 고향 집에 남아 있는 나의 흔적들은 현재의 내 모습과 너무 동떨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터미널에 앉아 있으려면 또 숨을 골라야 했다. 사진으로 뭘 할 수 있겠나, 하던 대로 전공공부 열심히 해서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해야지. 대학생들이 사회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냐? 전쟁을 겪어 봤냐? 빨갱이가 얼마나 무서운지, 어려운 세월 겪어보지 않은 너희는 모른다. 부모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했다. 나도 이제 어른이니, 내 뜻대로 가슴 뛰는 일을 하며 살겠다고 오기를 부렸지만 뭘 할 수 있을지, 막막하고 불안한 것은 사실이었다. 부모님의 생각조차 바꾸지 못하면서 무엇을 하겠냐는, 자책이 뒤따랐다. 엄마가 챙겨주신 음식 꾸러미를 들고 서울행 버스에 오르는 발걸음은 마음만큼이나 무거웠다.
서울과 대전의 양쪽 터미널에서 내 마음은 늘 어지러웠다. 떠나온 곳과 떠나갈 곳,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념이 교차하는 곳, 이십대 초반의 나에게 터미널은 그런 곳이었다.
쿠알라룸푸르 페케릴링(Pekeliling) 버스 터미널.
우리는 제란툿(Jerantut)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엄마, 버스 언제 와?
곧, 곧 오겠지.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곧, 이라고 말은 하지만 버스가 언제 올지 모르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따져보면 여행하면서 정시에 출발하는 버스나 기차를 타본 적이 거의 없다.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결국 오지 않은 적도 있었으니, 늦더라도 와 주면 고마운 일이다.
11시 출발한다던 버스는 거의 한 시간쯤 지난 후에야 우리를 태워주었다. 목적지까지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창밖의 풍경은 단조로웠다. 가끔 조그만 마을이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 온통 초록의 숲과 플랜테이션 농장이었다.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다들 잠에 빠져들었다. 해람이는 불편한지 자주 깨어 자세를 고쳐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다가 경유지에서 버스가 멈춰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동안 잠이 완전히 달아나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양파! 간간이 나타나는 마을에서 양파 모양 Dome을 찾아내기도 하고 알록달록 다양한 크기의 동그라미가 그려진 버스 천장에서 모양 찾기를 했다. 개구리, 원숭이, 외계인, 달, 꼬마의 머릿속에서 그려내는 그림이 재미있어 맞장구를 쳐주었다. 다섯 살 해람이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 생각보다 재미있다. 아이 걸음에 맞추어야 하는 게 답답하고 종종 업고 다니는 고달픔도 있지만, 아이가 발견해내는 것을 보고 듣는 즐거움이 있다. 지루한 버스 여행에서도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내는 참신함이라니! 조잘조잘 떠드는 소리에 내가 좋아라하면 ‘엄마, 또 해줄까?’ 하며 끝도 없이 이야기를 지어낸다. 심심함을 허락지 않는 훌륭한 동행이다.
제란툿(Jerantut), 터미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한바탕 비가 쏟아졌다. 터미널에 앉아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것을 바라보다가 어젯밤 예약한 숙소에 전화를 걸어 픽업을 부탁했다.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유치원처럼 온통 노란색으로 칠해진, 조그만 모텔이었다.
사실, 이 도시엔 별로 볼만한 것이 없다. 여기에 온 이유는 오직 터미널, 그 때문이었다. 열대의 원시림, 타만네가라 국립공원에 가기 위해 들르는 곳, 타만네가라 행 버스를 갈아타려고 여기에 온 것이다.
처음에는 제란툿에서 하루 자고 타만네가라에서 이틀을 보내려 했는데 계획을 바꾸어 제란툿에서 이틀, 타만네가라에서 하루를 지내기로 했다. 한국에서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데 타만네가라에 가면 인터넷이 안될 것 같아서 여기서 선거 결과를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모텔이 노란색인데다 직원도 노란 셔츠를 입고 있으니 예감이 좋다고 좌린이 말했다. 덕분에 하루 쉬어가는 날이 되었다.
타만네가라행 버스 시간표를 알아보고 터미널 근처를 돌아다녔다. 시장 구경을 하고 마트에서 장을 봤다. 소도시의 읍내 모습이 정겨웠다. 관광지가 아니라서, 여행자의 취향을 좇아 꾸미지 않은 것도 좋았다. 마트에서 장을 보려니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으로 돌아온 느낌도 들었다. 신학기 세일을 하길래 연필과 볼펜을 사고 과일과 요구르트, 그리고 선거 방송 보면서 마실 맥주도 샀다. 싱싱한 채소들과 식 재료를 보니 문득 요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엌으로부터 탈출! 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했으면서 마트에 오니 뭘 해 먹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걸 보니 어쩔 수 없이 아줌마다.
며칠 전에 언니가 카톡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물었을 때 없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 딱 하나 있었다. 현미밥에 김치! 솔직히 무척 그립다.
예전에는 여행하면서 한국에 두고 온 것을 떠올리는 것은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내게 익숙한 것은 멀리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한국 식당을 찾아다니지 않고 입에 맞지 않는 현지 음식에 적응하려 애를 썼다. 그런 노력으로 얻은 성과는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태국의 팍치, 영어로는 코리엔더, 중국말로는 샹차이(향채), 우리는 고수라고 불리는 허브를 즐길 수 있게 된 것. 처음 태국에 갔을 때는, 누군가 ‘썩은 행주 냄새’라고 말한 이 허브가 너무 역했다. 식당에 들어가면 팍치 넣지 말라는 이야기부터 했는데, 여러 나라에서 자주 접하다 보니 시나브로 적응이 되었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태국음식점 같은 델 가면 ‘고수 좀 팍팍 넣어주세요.’라고 할 정도로 좋아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그리움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맛은, 가장 솔직하게 나를 드러내 주었다. 낯선 시공간에 서 있어도 삼십 년 넘게 살아온 세월과 간단하게 결별할 수 없음을 시인하기로 했다.
마침 숙소에 손님도 별로 없으니 부엌을 빌려 밥을 해볼까 싶었는데 여기 쌀이랑 다른, 찰진 한국 쌀이나 일본 쌀을 찾지 못했다.
말레이시아에 처음 도착한 날엔 아이들이 음식 때문에 고생할까 봐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다행히 아이들이 새로운 음식을 잘 받아들였다. 특히 여기 숙소 근처의 중국 식당에서 파는 음식은 한국에서 먹던 것과 비슷했다. 낮에만 하는 국수 가게에서 파는 짜파게티 비슷한 면 볶음, 그리고 수제비 비슷한 국수가 입에 잘 맞았다. 멸치 국물이 시원했다. 해람이는 이틀 내내 탕수육! 여행하면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스럽다면 중국 식당을 찾아가는 것도 방법이다. 아무래도 한국 식당보다는 찾기 쉬우니까, 어디에나 중국 사람들이 모여 사는 차이나 타운은 있으니까. 메뉴판에서 'Sweet and Sour~'를 찾으면 달콤새콤 탕수 소스를 끼얹은 요리를 먹을 수 있다.
터미널에서부터 우리 숙소까지는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이다. 군데군데 자투리땅에 채소를 오밀조밀 심어놓은 모습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서울에서 우리가 가꾸던 텃밭이 떠올랐다. 옥상 화분에 심어둔 쪽파가 겨울을 잘 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언젠가부터 보기 좋게 잘 꾸며진 정원보다 텃밭이 있는 집이 좋아졌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까지는 아니라도 푸르른 잔디와 예쁜 꽃밭이 있는 주택, 애초에 집에 대한 로망은 그런 것이었다. 우리 집은 아니지만, 그 비슷한 집에 살아본 적이 있다. 잔디밭이 딸린 단층의 통나무집,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석 달간 얹혀 지낸 아는 분의 집이 그랬다. 그 동네의 집들은 다 그렇게 관광지의 예쁜 펜션처럼 보기 좋았다. 한국 사람이 오클랜드에 집을 사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첫 번째, 바닥에 전기온돌을 깔고 두 번째, 잔디밭에 제초제를 뿌린다. 교민들 사이에서 우스개처럼 하는 소리가 처음엔 마뜩잖게 들렸다. 전기온돌은 공감할 수 있지만, 이 보기 좋고 아름다운 잔디에 제초제를 뿌린다니, 무지막지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집에 머무르며 밥값을 하기 위해 잔디를 깎아보니 푸른 잔디밭을 유지하기 위해 생각보다 많은 정성과 수고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잔디밭을 소유한 집에 대한 환상을 지우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게으름 때문. 그리고 내 손으로 농사를 지어보니, 보기 좋게 잔디를 가꾸는 것보다 제 먹을거리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일이 더 보람되고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잔디 가꾸기엔 소홀하지만 조그만 자투리땅, 스티로폼 상자에라도 씨를 뿌려 상추와 가지를 길러 먹는 한국 사람들, 우리 사는 모습이 좋아졌다.
십 년 전에 여행하면서 그리워한 음식은 지금과 달랐다. 회사 앞에서 즐겨 먹던 부대찌개, 집 근처 분식집의 쫄면과 라볶이. 그때도 뭔가 거창한 음식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흔히 먹던 음식이 가장 먼저 생각나긴 했지만.
현미밥과 김치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걸 보니 그 사이 한국에서 내가 즐겨 먹는 음식에 변화가 생겼다는 게 느껴진다. 외식을 덜 하고, 소비를 덜 하고 그러면서 잘 먹고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아이들에서 비롯되었다. 아이에게 먹이려고 보니, 세상의 음식이 너무 험하게 느껴졌다. 유기농산물을 찾고 생협에 가입하고 그러다가 텃밭을 일구게 되었다.
안전한 먹을거리에 대한 고민은 전반적인 생활,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갔다. 아이들의 미래를 놓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생겼다. 아무래도 세상 변하는 속도가 너무 빠른 것 같고, 달려가는 방향에 회의가 들었다. 곳곳에서 경고음을 내는 생태계의 위기가 무섭게 느껴졌다. 치열한 경쟁에 살아남을 수 있도록 스펙을 잘 쌓으면 뭐하나. 우리가 마구 쓰고 버리고 제멋대로 파괴해서 이 땅이 병들어 살 수 없게 된다면. 이미 편안함에 젖어버린 일상을 송두리째 바꿀 수는 없더라도 작은 실천을 이루어 나가기로 다짐했다. 고작 다섯 평도 되지 않는 텃밭을 소중하게 여기는 까닭이다.
학생이 아니라 생활인이, 두 아이의 부모가 되니, 사회에 대한 책임감도 느낀다. 대학 때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지만, 솔직히 절실한 내 문제로 인식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 대해 현실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우리 아이들이 냉혹하고 야만적인 사회에서 아프게 살아갈까 봐, 솔직히 두렵다. 내가 방패가 될 수 있을까? 얼마나? 언제까지? 나 혼자 어찌할 수 없기에, 개인적으로 해결책을 찾으려 하기보다 사회 구조적인 원인을 살피고 바꿔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거창한 뜻에 비해 실천은 막연하지만,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살피고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는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버스 터미널
타만네가라행 첫차를 타기 위해 새벽부터 서둘러 터미널에 왔다. 지난밤, 노란색 모텔의 예감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좌린과 밤늦게까지 짐을 꾸리며 쓴 맥주를 마셨다. 아이 낳아 기르며 부모님과의 관계도 많이 좋아졌는데 끝까지 설득하지 못한 것이 씁쓸했다.
구닥다리 로컬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기사 옆에 불룩하게 솟아 있는 엔진룸을 보니 옛날 버스가 떠오른다. 우리가 70년대로 돌아가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아니겠지, 설마. 그런 상상은 괴롭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