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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와 책벌레가 만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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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학고재 제공

어떤 글자는 쫀득쫀득 인절미
어떤 글자는 동치미처럼 상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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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거나 먹거나
김주현 글·문종훈 그림/학고재·1만2000원

책벌레와 책벌레가 만났다. 한 책벌레는 책을 갉아먹는 좀벌레, 다른 책벌레는 책읽기를 좋아해 책에 파묻혀 사는 사람. 종이에 찍힌 글자를 좋아하는데 둘째가라면 서러울 두 생물이 만났으니 전쟁 불사는 불 보듯 뻔한 형국!

“오호, 이 글자는 한겨울에 언 동치미처럼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글자 아니더냐.” “어떤 글자는 쫀득쫀득 인절미처럼 차지고, 어떤 글자는 겨울밤에 먹는 메밀국수 한 그릇처럼 구수하도다. 날마다 이리 맛난 글자들을 먹을 수 있으니 이보다 멋진 인생이 또 있겠는가.” 반와선생의 책 예찬을 듣다 보면 책을 뜯어먹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군침이 돈다. ‘목란’(木蘭)과 ‘추국’(秋菊) 글자를 호로록~ 한입에 털고 나니 몸에서 향기로운 냄새까지 배어나오는 것 같다. 반와선생은 책을 망가뜨리는 책벌레다. 성균관 개구리라는 말로 자나 깨나 책만 보는 사람을 놀리듯 부르는 ‘반와’를 자청했다. 반와 탓에 소중한 책이 망가져 분노한 또 다른 책벌레는 조선시대 실학자이자 책읽기를 너무나 좋아해 스스로를 ‘간서치’(책만 보는 바보)라고 불렀던 이덕무다.

“흰 좀벌레 한 마리가 내 <이소경>에서 추국, 목란, 강리, 게거 등의 글자를 갉아먹었다. 처음에는 너무 화가 나서 잡아 죽이려 했는데, 조금 지나자 그 벌레가 향기로운 풀만 갉아먹은 것이 기특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특이한 향내가 그 벌레의 머리와 수염에서 넘쳐나는지를 조사하고 싶어졌다.” 이덕무가 썼던 글에서 출발해 두 책벌레가 실제 만난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상상의 나래를 펴는 이야기다.

이덕무는 심부름꾼까지 불러 책을 뒤지다가 마침내 반와선생과 조우한다. 괘씸했지만 ‘글맛’을 제대로 아는 반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어떤 글자를 먹을까 하는 기대로 신이 난다네.” “이런 이런, 나랑 똑같지 않은가. 나도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무슨 책을 읽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네.” 두 책벌레는 달빛 아래서 책을 이야기하며 우정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책을 팔아 쌀을 사야 할 정도로 이덕무의 살림살이가 곤궁해지자 반와는 일대 결심을 하게 된다.

유머가 넘치는 이 책에는 책에 대한 사랑 못지않게 친구를 위하는 애틋한 마음이 짙게 배어 있다. 친구의 책을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기꺼이 배를 곯고 친구의 추운 겨울을 돕기 위해 애쓰는 반와를 보면서 우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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