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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 체벌 방지 CCTV만 달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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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학대.JPG» 한겨레 자료 사진


한 어린이집에서 일어난 보육교사의 폭력적 체벌사건으로 온 세상이 술렁였다. 정부의 대응이나 대책들은 핵심을 짚어내지 못했고 엉뚱한 곳에서 헛손질로 철학의 빈곤을 드러내면서 분노나 냉소의 대상이 되고 있는 분위기다. 그 사이 정작 짚어져야하는 중요한 핵심 이슈들은 사라지고 있다. 어설프게 분노하고 어설프게 대책내고 어설프게 망각하다보면 우린 또다시 같은 문제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지난 4얼 16일이 이전의 수많은 사건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 첫 생각은 결국 터질 것이 터졌다는 느낌이었다. 해당교사의 행위를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어린이집 교사들의 근무환경은 유사한 사고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열악하기 때문이다. 2012년 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보육교사들의 대우는 하루 평균 9시간 반 근무에 평균급여 약 130만원으로 열악한데 반해 휴식시간은 74% 정도가 하루 한시간을 쉬기 어렵다고 한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단순히 소명의식이나 인성만으로 우리 아이들을 잘 봐주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애시당초 무리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결국 정치권에서 나온 해결책은 어린이집 내 CCTV의 확충과 교사양성제도의 개선으로 좁혀지고 있다. CCTV를 늘리면 어린이집은 교육적인 공간이 될까? 잠시간 마음의 안심을 가져다 줄 수는 있겠다. 그런데 CCTV의 사각지대는 어쩌나? CCTV를 달 수 없는 곳에는? 언어폭력이나 왕따같이 CCTV로 잡히지 않는 은밀하고 교묘한 폭력에 대해서는? 현대사회와 감시, 그리고 자유의 문제에 대해 깊은 성찰을 보여준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 데이비드 라이언은 불확실성이 높은 ‘유동하는 현대(Liquid Modernity)’에서 우리가 불안을 해소하기위해 감시라는 수단을 스스로 도입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감시는 감시받는자들의 몸속에서 ‘자기감시’라는 효과를 만들어 내게된다. 미셀 푸코가 ‘원형감옥(Penopticon)’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 ‘감시의 내면화’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는 감시자가 수감자의 전체(Pan)를 들여다보는 구조(Opticon)라는 일방향적 관계가 모두가 동시에(Syn) 서로를 감시하는 구조(Opiticon)로 발전한다. 이러한 상호감시(Synopticon)의 사회에서 어디서든 누구에게서든 감시받고 감시한다는 인식은 우리의 효율적인 선택은 불가능하다. 교사들이 상시 감시받고 (있다는 생각속에) 있을 때 어떤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교육적 행위가 가능할 것인가? 가장 창의적이어야 할 직업군 중 하나인 교사의 손발을 묶어놓고 좋은 교육을 기대하는 모순이 벌어지는 것이다.  


부모들이 교사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교사들이 흔들리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아이들에게 돌아온다. 요즘 믿을만한 보육기관을 찾아 헤매다보니 공동육아 어린이집들이 관심의 초점이 되는 모양이다. 물론 교육을 소비하고 아이들을 위탁하는 태도를 극복하고 부모들이 공동체를 꾸려 함께 아이들을 키울수 있다는 점에서 공동육아는 매우 신뢰할만한 대안이다. 그러나 공동육아 어린이집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부모들의 참여도가 높은 만큼 교사들과 부모들 사이에 갈등이나 장애물은 더욱 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부모들과 교사들이 교육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상호간에 신뢰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부모와 교사가 서로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교권을 세워주기위해 체벌을 합법화하자는 뜻은 아니다. 교사의 권위란 폭력적인 행위를 동반한 겁박을 통해 세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권위라는 뜻의 영어단어 Authority는 작가라는 의미의 Author와 같은 어원을 가진다. 즉, 세계를 자신의 눈으로 새롭게 해석해낼 수 있을 때 권위가 생겨난다는 의미다. 새로운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 ‘체벌’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고 본다. 


전통적으로 우리 문화는 교사의 위치를 군사부일체와 같이 강한 수직관계로 파악해왔다. 따라서 체벌과 관해서도 앞에 ‘교육적’이라는 전제가 붙으면 쉽게 용인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이어왔다. 한자로 가르칠 교(敎)는 아이 자(子)와 칠 복(攴), 본받을 효(爻)의 합자라니 교육이란 원래 체벌을 전제로 한다거나, ‘교편(鞭: 채찍 편)을 잡는다’는 말로 교직을 표현하는 것 역시 이러한 문화의 반영일 것이다. 게다가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잠언 13:24)는 기독교적 세계관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아동복지시설 운영자가 공동체생활의 질서를 위한 훈계와 지도를 목적으로 빰을 때린 것이 아동복지법의 아동학대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결한 최근의 사례는 이런 전통적 구조를 반영한 것이리라. 즉, 너무 심하지만 않다면 집에서는 (혹은 교육/보육 기관에서까지도) 교육적 행위로서의 체벌이 권장되는 가치관을 전통적으로 형성해왔다. 이번 사건에 대한 분노도 내 자식을 ‘나 아닌 사람’이 때릴 수 있냐는 지점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체벌 문제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1979년 스웨덴이 <부모 및 보호자법>에 ‘체벌이나 여타 모멸적인 대우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조항을 삽입한 이래 이미 전 세계 43개국은 가정이냐 교육기관이냐, 누가 하느냐와 관계없이 모든 체벌을 금지하고 있다. 또한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아무리 가볍다 하더라도’ ‘물리적 힘이 사용’되거나 ‘무시, 조롱, 창피, 비난’ 등의 비 신체적 처벌 등 ‘모든 형태의 체벌’은 ‘예외없이 모멸적’이기 때문에 ‘아동권리협약과 양립할 수 없’으므로 금지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왜 이 것은 불가능한가?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부지불식간에 수직적인 구조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보호하는 사람과 보호받는 사람 사이의 상하관계 속에서 교사와 부모는 아이나 학생을 부족한 존재, 하등한 존재, 따라서 나에게 종속된 존재로 바라본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군사부일체’의 신화는 교사와 부모를 제왕적인 권력자로 군림하게 한다. 그러다보니 무엇이든 내 영역(가정이나 교실) 안에서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무의식이 행동으로 표출되기 쉽다. 여기에 ‘교육적’이라는 수사가 붙으면 어떤 행위든 용인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가 이러한 수직관계를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직적인 권위는 붕괴되었는데 수평적 소통능력은 전혀 길러지지 않은 과도기적 상황을 살아가고 있다. 부모도 교사도 어떻게 아이들과 수평적 관계맺기를 이어나갈 것인지 알지 못한다. 어떻게 민주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지 배운 적이 없다. 다만 아이들을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물질적으로 겁박하면서 원하는 행동을 빠르게 보기만을 원했을 뿐이다. 부모세대이자 교사세대인 우리도 그렇게 자랐고, 그 외에 다른 방법을 배운적도 없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가정에서부터 체벌의 고리를 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원칙있고 엄격한 교육적 태도는 중요하다. 문제는 이를 실현하는 방식이 ‘체벌’이라는 비인간적 수단에 기대어야 성취될 수 있는 것인가의 문제다. 바움린드나 쉐퍼와 같이 부모의 양육태도를 연구한 학자들은 권위있는 것과 권위적인 것, 오냐오냐하는 것, 폭력적인 것이 각기 구분되어야 함을 지적한다. 아이들의 욕구와 관심을 충분히 수용하지만 분명한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 안에서 스스로 삶을 꾸려나가도록 돕는 것이 부모와 교사의 역할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교사교육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보육교사가 지나치게 간소화된 방식으로 양성되어 왔으니 4년제 대학으로 양성과정을 한정하고 국가고시를 시행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미 그 제도를 따르는 초중등 교사양성과정은 얼마나 좋은 교사를 양성하고 있나? 기능적으로 교육과정과 교육평가, 교육심리, 교육행정을 배운다고 좋은 교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험을 통해 좋은 교사를 걸러내기도 어렵다. 결국 우리 사회가 생각하는 ‘좋은 교사’란 무엇인지, 그런 교사는 어떤 교육을 통해 길러질 수 있는지, 그 교육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고 전달되고 실습되어야 하는지 전면적인 성찰 없이는 다시 CCTV 설치와 같은 피상적 문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교육을 위한 더 많은 고민과 지혜가 사회적으로 소통되기를 기대해본다. 


하태욱 (uktaeha@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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