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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 매니저 뺨치는 잠실 엄마들의 사교육 종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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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수로 7년째 살아온 잠실을 떠나 서울 강북 지역으로 이사를 앞두고 있는 작가 정아은. 그는 “‘잠실’은 잠실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서울 전체가 잠실처럼 끔찍하게 바뀔 것 같아 두렵다”고 말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모던 하트’ 정아은 두번째 소설
내 아이를 주류로 만들리라…
이 시대 보통 맘들의 노골적 욕망

잠실동 사람들
정아은 지음/한겨레출판·1만3500원

<잠실동 사람들>은 <모던 하트>로 2013년 제18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정아은의 두번째 소설이다. 첫 작품이 한국 사회의 뿌리깊은 학벌주의와 성차별에 메스를 들이댔다면, 이번 책은 학벌주의의 결과이자 원인이기도 한 초등생 사교육 열풍을 까발린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이 그 열풍의 현장이다.

“비록 나는 주류에 끼어들지 못했지만 내 아이들은 주류로 살게 하리라. 주류 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선 주류가 되게 하리라. 한 번뿐인 인생, 아이들이 세상의 부와 권력을 실컷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집이 가난하다고, 촌년이라고 놀림당하는 설움을 자식들에겐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강북의 허름한 빌라를 판 돈에 은행 대출을 더해 가까스로 잠실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온 지환 엄마 박수정. 초등 2학년인 지환의 영어 듣기 공부를 감독하고 학원을 물색하며 과외교사를 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과다. 같은 동네 엄마들이 사용하는 영국제 유명 찻잔을 구입하고 지환을 축구부 친구들이 다니는 영어 학원에 데려가 ‘레벨 테스트’를 시키는 데에서 보듯 그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흉내내고 따라잡으려는 일종의 파생 욕망이다. 그러나 파생을 낳은 진원지를 찾기 힘들게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고 복제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시뮐라크르의 속성을 지닌다.

<잠실동 사람들>은 해성 엄마 장유미, 태민 엄마 심지현, 경훈 엄마 강희진 등 박수정의 동지이자 경쟁자인 학부모들과 과외 교사 김승필, 학습지 교사 차현진, 원어민 강사 지미 더글러스, 초등학교 교사 김민하 같은 공·사교육 관계자들 그리고 파견 도우미 최선화와 그 딸인 대학생 이서영 등 주변 인물들을 차례로 초점화자로 내세워 잠실발 사교육 열풍과 치맛바람을 생생하게 그려 보인다.

학원과 과외 일정표에 따라 아이를 쉴 틈 없이 내모는 엄마들은 연예인 매니저를 닮았다. 경시대회를 준비시킨다며 초등생을 새벽 두세시에 재우고, 학원 운영 시한인 밤 10시 이후에는 카페에서 비밀리에 교습을 하며, 드물게 소신을 지니고 아이를 학원에 보내지 않는 부모조차 학원에 가야 친구를 사귈 수 있는 분위기 때문에 고민을 한다.

미친 바람이라고나 할 일들이 일상의 탈을 쓰고 이어지는 가운데, 몇몇 부모의 비뚤어진 자식 사랑이 불러온 등교 거부 집단행동, ‘명문대’ 출신에 유력 학원 강사 경력을 위조한 과외 교사 김승필의 정체 발각 같은 사건이 비교적 큰 비중으로 묘사된다. 학자금을 마련하고자 몸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옆집 우유나 남은 배달 음식을 훔쳐 먹는 이서영과 그 어미 최선화를 통해서는 사교육 열풍의 이면이자 바탕을 이루는 극심한 빈부격차의 현실이 노출된다.

정체가 탄로난 뒤 일자리가 끊긴 김승필을 격려하고자 그의 반지하방을 찾아갔던 박수정은 어둡고 냄새 나는 그 집을 나서면서 새삼 안도감과 행복감을 느낀다. “남의 딱한 처지를 곱씹어 내 행복을 실감하다니” 반성하면서도 솔직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욕망과 반성이 공존하는 이런 양면성은 ‘아파트’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같은 아파트에 살던 친구가 성북동 단독주택으로 이사했다는 소식을 접한 희진은 불행감에 사로잡힌다.

“영훈이 이사 간 뒤 한동안, 리센츠라는 성냥갑 아파트가 그렇게 누추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하늘도 보이지 않고 무식하게 고층 아파트만 빽빽이 들어서 있는 삭막한 공간. 미라곤 찾아볼 수 없고 살아남기 위한 경쟁만이 난무하는 노골적이고 저급한 공간.”

그러나 ‘성공’을 위해 거짓도 마다하지 않는 승필에게는 희진네의 아파트가 곧 꿈의 대상이다.

“나는 돈을 많이 벌 것이다. 많이 벌어서 이런 아파트를 살 것이다. 착하고 잘 웃는 여자를 만나 살림을 꾸릴 것이다. 아이를 낳아 이런 유모차에 태우고 다닐 것이다.”

희진이 소신에 따라 아이를 학원에 보내지 않거나 아예 영훈을 좇아 잠실 아파트촌을 벗어나도 그 빈자리는 수정과 승필 같은 이들이 메꿀 것이다. 그러니 ‘잠실’은 계속된다. <잠실동 사람들>은 한국 문학 지도에 21세기 초 서울 잠실이라는 공간을 인상적으로 새겨 넣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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