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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석의 내가 사랑한 그림책] 종이 봉지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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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7_1.jpg» 그림 비룡소 제공

왕자를 구한 공주는 왜 떠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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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봉지 공주
로버트 문치 글, 마이클 마첸코 그림
김태희 옮김/비룡소·7500원

로버트 문치가 글을 쓰고 마이클 마첸코가 그림을 그린 <종이 봉지 공주>(1998)에는 왕자와 공주, 그리고 용이 나온다. 등장인물만 놓고 보면 흔한 서양 전래동화가 아닐까 싶다. 전래동화에서 왕자와 공주, 용은 전형적인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왕자는 용에게 잡혀 있는 공주와 사랑에 빠지고 마침내 용을 물리친 후 공주와 결혼한다. 둘은 영원히 행복하게 산다.

심리학자 브루노 베텔하임은 이러한 삼각관계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상징적 반영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왕자가 용을 물리치고 공주와 결합하는 것은 아이가 늙은 아빠를 물리치고 엄마와 결합하고 싶은 소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베텔하임의 해석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전래동화의 남성 중심성이다. 왕자가 공주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공주가 하는 일은 그저 왕자가 잘 싸워주길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뿐이다. 이런 이야기에 요즘의 여자아이들이 만족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비록 공주가 입고 있는 예쁜 드레스는 마음에 들어 하지만 공주의 수동적인 태도엔 감정이입을 하지 못한다.

<종이 봉지 공주>는 전통적인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는다. 용에게 끌려가는 것이 공주가 아니다. 왕자가 끌려가고 공주는 용에게 끌려간 왕자를 찾으려고 길을 떠난다. 예쁜 드레스는 용이 다 불태웠기에 길에서 주운 종이 봉지 한 장만이 공주가 걸친 전부이다. 공주는 원래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삶과 죽음 앞에서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다. 여자라면 가꿔야 한다는 말은, 여자라면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야 한다는 말은 종이 봉지 공주에겐 통하지 않는다. 기존의 전래동화를 읽으며 수동적인 공주의 모습에 짜증을 내던 여자아이들이라면 이런 도입부부터 금세 빠져든다.

이어서 용을 만난 공주는 재치로 용을 제압한다. 한번 불을 내뿜으면 50개의 마을을 태울 수 있고, 10초 만에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용이지만 어리석기 짝이 없다. 자기 힘을 자랑하게 만들었을 뿐인데 용은 자기가 가진 에너지를 모두 소진시킨다. 이처럼 힘과 과시에 빠져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어른들이 바로 용이다.

용이 쓰러지고 공주는 왕자와 만난다. 비록 멋진 드레스를 입고 있지 않고 머리는 불에 그슬려 산발이지만 공주는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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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석 소아정신과 의사
그런데 왕자는 공주에게 고마워하기보다 공주의 옷을 타박한다. “진짜 공주처럼 입고 다시 와!” 종이 봉지 공주는 그때서야 자신이 헛짓을 했다는 것을 느낀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를 위해 자신이 위험을 무릅썼다는 것이 후회스럽다. 그래서 왕자를 버리고 떠난다. 그런 공주의 앞쪽으로 태양이 떠오른다.

<종이 봉지 공주>는 <신데렐라>와 <잠자는 숲 속의 공주>로 이어지는, 선택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여성성에 대한 거부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마이클 마첸코는 아이들이 편하게 생각하는 만화풍의 그림을 통해 도발적인 주제를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주제지만 중간중간 나오는 유머러스한 장면 덕에 아이들은 그저 즐거워한다. 그렇게 즐거울 수 있기에 아이들은 이 책을 읽고 또 읽는다. 그리고 조금씩 주체적인 인간으로, 어떤 위기에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해 나간다.

서천석 소아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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