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이 사라졌다!미국 뉴욕의 버스정류장에 붙어 있는 제이 하워드 밀러의 저 유명한 ‘위 캔 두잇!’ 포스터(1942)에선, 건강한 팔뚝을 드러내며 주먹 불끈 쥔 여성이 지워졌다. 2차대전 당시 웨스팅하우스 공장에서 여성들의 근로 의욕 고취용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1980년대 페미니즘 물결 속에 일하는 여성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재발견되며 수많은 광고에 등장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도 모나리자 대신 시커먼 자리만 남았다. <보그>, <더블유>의 커버 이미지나 배우 캐머런 디아즈의 책 표지에서 여성들이 도려내지고, 한 라디오방송에선 여성 목소리가 지워진 노래 186곡이 흘러나왔다.외신들이 전한, 지난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미국에서 펼쳐진 ‘낫 데어’(Not there) 캠페인의 풍경이다. 아직 양성평등이라는 ‘거기’(there)에 이르지 못한 세상을 상징하듯, 클린턴재단은 광고회사 ‘드로가5’ 등과 손잡고 여성들을 지운 광고와 잡지 등을 선보였다. 대형 회사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광고 변형을 허용했다. 힐러리 클린턴을 비롯한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 프로필에 투명 여성 실루엣을 내걸며 동참했다. 단 하루, 온라인이나 광고 속이긴 하지만 여성이 사라진 세상이라. 내겐 ‘여성의 21세기 파업 선언’처럼 읽혔다.캠페인 이름은 40년 전 전미여성기구(NOW)가 ‘앨리스는 … 않는다. 어디서도, 더 이상’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벌였던 여성들의 3시간 파업을 떠올리게 했다. 그 직전 해 개봉해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던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유일한 여성 주인공 영화 <앨리스는 더 이상 여기에 살지 않는다>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었다. ‘앨리스 파업’은 비록 백인 중산층 여성 중심의 운동이란 비판을 받았지만, 유엔이 ‘국제 여성의 해’로 선포하며 첫 국제회의를 연 것과 함께 1975년을 여성운동 역사의 특별한 해로 기억하게 만든 사건이다.그 뒤 40년.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일할 권리가 신장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대한민국에서도 여성 대통령이 나온 시대다. 하지만 그 속도를 충분하다 할 수 있을까? 지난 6일 국제노동기구가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남녀 임금격차는 앞으로 71년간 지속될 전망이다. 베이징선언이 있었던 20년 전과 비교해서도 남녀의 취업률 격차는 단 1%밖에 줄어들지 않았다. 특히 아이를 가진 여성들은 없는 여성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남성은 반대로 아이가 있는 사람들의 임금이 높다.최근 ‘저출산’ 대책 마련이 국가적 과제라며 떠들썩하다. 만혼 대책, 청년 일자리 대책 등이 중점적으로 거론되지만, 양성평등 달성의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것 없이 가능한 일일까. 아이가 잘 클 수 있는 조건을 만들면 출산율이 올라갈 것이라며 보육에 힘을 쏟아붓는 정책은 지난 10년간 많이 해왔다. 이제는 한발짝 더 나아가 ‘엄마가 행복해야 아동이 행복하다’는 관점이 필요하다. 여성취업률이 높으면 경제적 안정감으로 전체 합계출산율이 올라간다는 건 이미 2000년대부터 국제적으로 입증되어 왔다.
지난해 “김연아, 이상화 같은 딸을 낳아야 한다”, “아기 많이 낳는 순서대로 여성 비례 공천 줘야”라고 발언했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같은 이들의 인식은, ‘여성이 나라 위해 아이 낳냐’ 같은 반발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20년 전부터 ‘소자화’ 대책이라고 여성수첩 도입 등 온갖 아이디어를 내놨던 일본의 실패 경험은 반면교사다. <이코노미스트>가 얼마 전 고등교육과 남녀 임금 격차 등을 종합해 점수로 낸 ‘유리천장 지수’에서 한국은 그 일본보다도 아래인 최하위를 기록했다.어쩌면, 40년 전 파업이 다시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김영희 문화부장 dora@hani.co.kr
김영희 문화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