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서울 길동복조리시장에 위치한 ‘총각네 고깃집’ 사장 탁재식씨가 ‘책읽는 가게’ 서비스로 신청한 책을 강동도서관 방윤경 문헌정보실장에게 건네받고 있다.
이색 독서 프로그램
서울시 강동구 길1동 길동복조리시장에 위치한 은혜지압원. 출입문에 붙은 스티커가 눈에 띈다. ‘꿈과 희망을 찾는 책 읽는 가게’. 언뜻 생각하기에 손님이 기다리면서 읽을 수 있게 책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내부에 들어서자 따로 마련된 책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아이가 그림책을 읽고 있었다.지난 11일. 강동도서관 사서 구본경씨는 지압원을 방문해 아이 엄마인 김선화씨에게 책 10권을 건넸다. <위층 할머니, 아래층 할머니> <아기 구름 울보> 등 김씨가 미리 대여신청을 한 책들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강동도서관에서 전통시장 상인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다. 사서가 상인이나 그 자녀들이 읽고 싶은 책을 가게로 직접 배달해주는 ‘책 읽는 가게’(이하 책가게) 서비스로 길동시장 상인이라면 누구나 이용 가능하다.독서가 사고의 폭을 넓히고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일에 치이다 보면 책 한권 여유롭게 읽는 것도 여의치 않다. 독서의 양극화도 갈수록 심해진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이런저런 책을 접하며 더 많이 읽고 싶어하는 반면, 책을 안 읽는 사람들은 점점 더 책과 멀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도서관에서 직접 주민들에게 책을 배달해주거나 낭독하며 책을 읽는 등의 이색 독서 프로그램이 생겨나고 있다. 책을 쉽고 가깝게 접하며, 재밌게 읽기 위한 목적이다.강동도서관 사서 14명은 각자 3~4개의 가게를 맡아 꾸준히 관리하고 있다. 연령대별 추천도서부터 신간, 자녀들의 학습정보나 ‘나들가게’ 같은 전통시장 관련 학습 정보 등도 정리해 매달 상인들에게 나눠준다. 구씨는 “처음에는 자주 찾아가다 갈수록 방문이 뜸해지면 상인들이 책을 다시 잘 안 빌리더라. 수시로 가게를 들여다보고 관심있는 분야를 묻고 관련 책을 추천해준다”고 말했다.시장은 도서관 입구에서 열 걸음이다. 그만큼 가까운 거리지만 장사하느라 바쁜 상인들에게 도서관은 그냥 ‘일부 시민들이 이용하는 공공기관’일 뿐이다. 사서들은 시작 당시 가게 한곳 한곳 일일이 방문해 독서 프로젝트를 홍보하고 권유했다. 이후 책가게가 점점 늘었지만 “장사하는 데 방해되니 나가라”고 문전박대하는 상인도 있었다. 그럼에도 사서들이 적극적으로 발품을 판 덕에 100여개 가게 중 현재 39곳이 협약을 맺었다.도서관 일반 이용자는 한번에 다섯권까지 2주 동안 책을 빌릴 수 있지만 책가게 상인은 서른권을 한달까지 빌릴 수 있다. 책가게만의 ‘특별 혜택’이다. 김선화씨도 “아이 아빠가 책을 더 많이 빌릴 수 있다고 해서 신청했다”며 “8살, 6살 아이들은 그림책이나 동화책, 나는 역사책, 남편은 추리소설이나 한국 소설을 빌린다. 한번에 다양한 책을 빌릴 수 있어 좋다”고 했다.장사에 바쁜 시장 상인들에게
책 직접 전달하는 서울 강동도서관
한번에 30권 한달간 이용 가능
지역 특성 고려한 서비스로 호응 커
서울교육청서는 ‘책, 새롭게 읽기’ 등
낭독하며 책 읽는 프로그램도 열어
내용 살려 책 읽자 감성도 풍부해져
지난해 도서관은 리모델링을 하면서 매점과 식당도 없앴다. 이용자들이 가까운 시장에 가서 먹을거리를 이용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도서관 직원들도 점심을 먹으러 오가는 길에 책가게에 들러 신청한 책을 주고 다 읽은 책은 수거해온다. 사서들은 연령대별로 ‘맞춤형 전략’을 쓰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책에 관심을 보이는 젊은 상인들에 비해 “먹고살기 바쁜데 무슨 책이냐”며 시큰둥한 어르신들에게는 글씨가 큰 그림책이나 <미생>처럼 인기있는 만화책을 먼저 권유하는 식이다.도서관 가까이서 ‘총각네 고깃집’을 운영하는 탁재식(35)씨는 맞은편 과일가게 친구가 이용하는 걸 알고 지난달 책가게를 신청했다. “책은 읽어야 하는데 장사하느라 바쁘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직접 찾으려면 시간이 꽤 걸려서 독서를 거의 못했다. 책가게 회원이 된 후 전보다 책을 많이 보게 됐다. 자기계발서나 경제서, 소설을 주로 읽고 최근에는 어릴 때 읽었던 <삼국지>를 다시 읽었다.”홍순영 도서관장은 “도서관이 주택가 안쪽에 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바로 인접한 전통시장 상인들부터 시작해 마을 주민 누구나 마실 가듯 놀러 오는 편한 곳으로 만들고자 한다”고 말했다.
기존의 책읽기 방식을 깬 독서법도 나오고 있다. 지난달 서울시교육청은 ‘책, 새롭게 읽기’를 주제로 낭독 워크숍을 열었다. 단순히 눈으로만 읽는 독서에서 벗어나 책을 직접 소리 내 읽으면서 색다르게 책을 접해보는 게 목적이다. 워크숍에 참여한 성우 서혜정씨와 배우 남명렬·이지혜씨는 각각 황순원의 <소나기>, 최인준의 <암류>, 주요섭의 <사랑손님과 어머니> 등을 직접 낭독했다. 서씨는 “책이나 글을 눈으로만 보는 것보다 낭독하면서 읽는 것이 훨씬 더 기억에 오래 남는다. 발음과 발성까지 덤으로 좋아진다. 30년 이상 성우로 활동하면서 직접 느낀 것”이라고 했다.가령, 백화점이나 복합영화관 등의 대형 주차장에 차를 주차할 때가 있다. 그때 차를 세운 바로 옆 기둥에 적힌 번호를 까먹어서 집에 돌아갈 때 애를 먹는 경우가 생긴다. 서씨는 “구역 표시 숫자를 눈으로만 외우지 말고 ‘B2-13!’이라고 입으로 내뱉으면 안 잊어버린다”고 했다.“학생들이 논술 같은 ‘쓰기’에는 익숙한데 토론과 같은 ‘말하기’에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낭독으로 단어나 표현 등 작가들의 화려한 문체를 입으로 내뱉다보면 어느 순간 내 것이 돼서 말하는 데 자신감도 생긴다.”낭독으로 책읽기는 책 내용을 최대한 살리기 때문에 감성이 풍부해지는 효과도 있다. 워크숍에 참여했던 유재정 국어교사(오금중)는 “성우가 소년과 소녀의 감정을 실어서 <소나기>의 일부를 읽어줬다. 주인공의 표정이나 상황이 한편의 영상처럼 머릿속에 그려졌다”고 말했다. 유 교사는 이 경험을 떠올려 얼마 전 어버이날에 앤서니 브라운의 책 <우리 엄마>의 일부분을 학생들에게 낭독해줬다. 이 책은 엄마가 왜 좋은지를 아이가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그는 “처음엔 나도 (손발이) 오그라들고 아이들도 민망해했다. 그래도 아이들이 마음속으로 내용을 느낄 수 있게 생동감 있게 낭독하려 애썼다”고 말했다.“책을 눈으로 보면 읽는 속도가 빨라서 내용 이해나 전개가 빠르다. 낭독은 책에 담긴 내용이 내 입을 거쳐서 나가는 거라 내용을 곱씹게 되고 감정이입이 더 잘된다. 한번씩 낭독해 보면 기존의 책읽기와 달리 색다르고 신선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글·사진 최화진 기자 lotus57@hanedui.com
책 직접 전달하는 서울 강동도서관
한번에 30권 한달간 이용 가능
지역 특성 고려한 서비스로 호응 커
서울교육청서는 ‘책, 새롭게 읽기’ 등
낭독하며 책 읽는 프로그램도 열어
내용 살려 책 읽자 감성도 풍부해져
강동도서관이 협약을 맺은 ‘책읽는 가게’ 출입구 유리창 등에 부착해주는 스티커. 강동도서관 제공
지난 11일 서울 길동복조리시장에 위치한 은혜지압원을 운영하는 김선화씨가 딸 지윤양과 책을 읽고 있다. ‘책읽는 가게’ 회원인 김씨는 이날 강동도서관 사서 구본경씨에게 대여 신청한 책 10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