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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던지는 감정을 먹으며 아이들은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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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길벗어린이 제공
서천석의 내가 사랑한 그림책
쇠를 먹는 불가사리
정하섭 글, 임연기 그림/길벗어린이 펴냄(1999)

산골 외딴집에 아이들과 남편을 전쟁에서 잃은 여자가 살고 있었다. 그 여자는 먹다 남은 밥풀을 비벼 작은 인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노래를 불렀다. ‘불가사리야. 너는 쇠를 먹고 자라서, 죽지 말고 자라서, 모든 쇠를 먹어치워라.’ 쇠로 만든 창과 칼에 가족을 잃은 한이 서린 노래였을 것이다. 이 노래를 들은 밥풀때기 인형은 정말 쇠를 먹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바늘과 같은 작은 쇠를, 나중에는 칼과 창에 대포까지 못 먹는 것 없이 다 먹어치웠다. 점점 커지고 점점 강해졌다.

정하섭이 글을 쓰고, 임연기가 그림을 그린 <쇠를 먹는 불가사리>는 불가사리 설화를 바탕으로 만든 그림책이다. 전래되는 설화와는 이야기 전개가 조금 다르지만 요즘 아이들이 읽기에는 차라리 더 낫다. ‘송도말년 불가사리’로 알려진 고전 설화는 지금 읽기에는 지나치게 남성 중심적인 이야기다. 게다가 설화에서의 불가사리는 주체라기보다는 도구에 불과하다. 한 남자가 불가사리를 이용해 세상을 혼란스럽게 한 뒤 미리 갖고 있던 부적으로 물리쳐서 한몫을 챙긴다. 불가사리는 무서운 존재지만 그저 돈벌이의 수단이다.

반면 정하섭의 불가사리 이야기에서 불가사리는 이야기의 주체다. 당당한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위기를 통과해 살아남는다. 하지만 이 불가사리 역시 진정한 주체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 이야기 속의 불가사리에겐 고뇌나 갈등이 없다.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심지어 생각하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정해진 대로 사는 인생인데, 그 방향은 스스로가 정한 것이 아니다.

불가사리는 자신을 만든 여성, 즉 엄마의 소원을 이루는 삶을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 그러다가 엄마가 위험에 빠지자 죽음을 무릅쓰고 불길 속의 엄마를 구해낸다. 그야말로 엄마들의 소망을 반영하는 대상이다. 이런 어른 중심의 이야기 전개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불가사리 이야기를 좋아한다. 뭐든지 다 먹어버리는 존재. 아무리 강한 것도 먹어버려 스스로 더 강해지는 괴물. 무섭지만, 아니 무섭기에 아이들이 꿈꾸는 모습이다. 아이들은 강해지고 싶어한다. 하지만 성장이란 너무 더디다. 공격을 받아 이겨내기 어려울 때, 어른들의 잔소리로 삶이 비참할 때면 아이들은 꿈꾼다. 이 모든 부정적인 힘을 다 흡수해서 더 강한 부정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되고 싶다고.

서천석 소아정신과 의사
서천석 소아정신과 의사
아이들의 그런 소망은 결국 꿈에 그친다. 그렇다고 완전히 꿈인 것만은 아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부정적으로 반응하면 아이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내면으로 흡수한다. 부모는 잘 하기를 바라서 야단치지만 아이가 받아들이는 것은 부모가 말한 내용이 아니다. 그저 부정적인 에너지다. 그렇다고 불가사리까지 되지는 않겠지만 부모가 던지는 감정을 먹으며 아이가 자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부모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내가 아이에게 주는, 그래서 아이가 먹고 자라는 감정은 과연 어떤 감정일까?

서천석 소아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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