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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민의 부탄살이] 아이들과 주사위놀이에 날 저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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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매거진 esc] 김소민의 부탄살이
 144119350327_20150903.JPG붐탕에서 탕 고개로 넘어가는 길은 그야말로 고개가 꺾이는 길이다. 나와 부탄인 탄딘을 태운 타타 소형트럭은 비포장 신작로를 타고 산을 기어올라가며 앓는 소리를 해댔다. 그때 그 길을 가던 4~5살 소년이 갑자기 손을 번쩍 들더니 차에 태워 달란다. 흙먼지를 뒤집어썼는데 짧게 자른 머리카락은 까슬까슬하고 볼은 복숭아다. 발목에서 몇 번 접어올린 추리닝은 원래 군청색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땅 색이다. 엉덩이까지 처지는 배낭을 멘 소년은 차문을 열어줬더니 덤덤한 표정으로 풀쩍 올라탔다.

“어디 가?” 탄딘이 종카어로 물었다. 무심히 창밖을 보던 소년이 뭐라 하는데 이 지역에서만 쓰는 말이다. 탄딘이 겨우 때려맞힌 것은 “두 살, 붐탕, 아빠, 위쪽”이 다다. 탄딘과 나는 당황했다. “우리 지금 유괴하고 있는 거야?” 우리야 속이 타건 말건 소년의 짧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파닥거렸고 소년은 태평했다. 맨발에 걸린 슬리퍼가 벗겨질 듯 말 듯 달랑거렸다.

“두 살 같지는 않은데. 애 아빠가 붐탕 시내에 있는 게 아닐까? 거기로 갈까?” 탄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우리 오빠도 어릴 때 만날 길 잃어버렸거든. 그때 사람들이 데려다주려고 어디 사느냐 물어보면 지금 사는 데가 아니라 5년 전 살던 큰 도시 이름을 대곤 했어. 애가 걷던 방향도 그렇고, 위쪽이라니까 그쪽 동네로 가보자.” 소나무들이 획획 지나갔다. 무슨 토론이 벌어지건 말건 소년은 두 손을 열린 창문 밖으로 뻗어 바람을 잡았다 놓았다. 솔 향이 휘감았다.

속수무책 산을 올라가다 처음으로 한 무더기 동네 사람들을 만났다. 건설 현장이었다. “이 애를 아세요?” 탄딘이 소년과 함께 내리자 머리에 흰 수건을 만 중년 여자가 뛰어나왔다. “아이고, 내 애예요.” 소년은 엄마 품에 푹 안겨 고개만 우릴 향해 젖혔다. 입꼬리 올라간 입술이 발갰다.

두 번째 히치하이크 아이들은 그래도 말이 드문드문 통했다. 윗동네 사는 6~9살 꼬마 7명이다. 좌석이 모자라 두 명은 짐칸에 나랑 같이 탔다. 시동은 자동차에만 걸린 게 아니었다. “이야~”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짐칸에 탄 우리는 이리저리 튀었는데 애들 입이 헤벌어졌다. 롤러코스터 따위는 댈 바가 아니다. 바람과 섞인 구름이 쏟아져 내렸다. 짐칸 두 애들은 거의 엑스터시 흡입 상태가 됐다. 그때 차 안 좌석에 앉은 여자애가 훌쩍이기 시작했다. “우리집은 윗동네인데 차가 지금 아래로 가고 있어요.” 그 애만 사태를 파악하고 있는 거다. 나머지 애들한텐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이들은 누구인지 알 바 아니다. 지금 솔바람이 콧구멍으로 들어가 똥구멍으로 관통하는 중인데 목적지 따위야 모를 일이다. 똑 부러진 여자아이 덕에 우린 집단유괴를 면했다. 애들은 하늘에 닿은 자기 동네에 도착했다. 동구 밖에 쪼르르 서서 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짐칸에 탔던 애들, 너무 흥분했나 보다. 필통을 두고 갔다. 찌그러진 철제 필통 안엔 손가락 한 마디만한 몽당연필이 대여섯 자루, 금이 간 플라스틱 컴퍼스 하나, 원래는 흰색이었을 듯한 새카만 지우개 하나 들어 있었다. 탄딘은 걱정을 쏟아냈다. “부탄 시골 부모들은 너무 속이 편해. 애들한테 낯선 사람 조심하라는 주의를 안 주잖아. 유괴당하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몰라.”

그렇게 붐탕 시내에서 외곽으로 한 시간여 떨어진 니마 할머니 집에 도착했다. 집에 들어섰는데 누구까지 식구인지 모르겠다. 이쪽 방엔 동네 할머니들이 모였고 부엌 텔레비전 앞엔 꼬마들이 <톰과 제리>를 보고 있다. 니마 할머니 손가락 관절은 뭉툭하고 손끝은 갈라졌다. 내가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니마 할머니가 배시시 웃었다.

(왼쪽부터) 데신의 사촌 소모노, 데신. 사진 김소민 제공
(왼쪽부터) 데신의 사촌 소모노, 데신. 사진 김소민 제공
니마 할머니가 연신 사진기 액정화면으로 자기 얼굴을 보는 사이 손녀 데신(10)은 이 부탄 사람처럼 생긴 ‘칠립’(외국인)의 간을 봤다. “몇 살이에요?” “동생 있어요?” “과자 먹을 줄 알아요?” 그렇다니까 볶은 옥수수 알갱이를 내왔다. “차 마실 줄 알아요?” 이번엔 우유를 탄 홍차다. 내가 옥수수 먹는 걸 구경하더니 결론냈나 보다. 주사위 하나 가져온다. “던질 줄 알아요?”

그렇게 주사위 게임판이 벌어졌다. 데신의 사촌 소모노(9)가 합세했다. 게임의 규칙은 말 안 통해도 통했다. 주사위 던져 가장 큰 숫자가 나온 사람이 이기는 거다. “6이다!” 데신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소모노는 의기양양했다. 소모노가 판돈을 올렸다. 이긴 사람이 진 두 사람 손목 때리기 하자는 거다. 부탄말로 ‘차메’란다. 이거라면 자신 있다. 어릴 적 손목 때리기로 가볍게 시작한 게 나중에 머리끄덩이 잡기로 끝난 적이 한두 번 아니다. 데신과 소모노는 가차 없이 온 힘을 두 손가락에 실어 날렸다. 그나마 나한테만 손목만 살짝 스치는 걸로 관용을 베풀었다.

이 게임의 마력은 대체 뭘까. <톰과 제리>를 보던 애들까지 몰려들었다. 니마 할머니가 나 앉으라고 방석을 가져다줬는데 겉 천이 해져 속이 보였다. 소모노가 그 방석을 빼 주사위 판으로 쓰려고 하니 할머니가 소모노의 등짝을 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사위는 돌았다.

게임이 중단된 순간은 딱 한 번, 나무판 얼기설기 이어 만든 바닥 아래로 쥐가 나타났을 때다. 판 사이 이가 벌어져 있는데 그 아래로 쥐가 코를 들이미는 게 보였다. 데신은 별것 아니라는 듯 두 발로 바닥을 쾅쾅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게임은 시작됐다. 주사위 하나에 해가 저물게 생겼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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