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에 결혼했을때 시댁 형님은 나와 동갑이었지만 이미 결혼 8년차였다.
스물다섯에 시집을 와서 8년동안 일곱살, 다섯살, 세살 세 아이를 둔 형님은 감히
내가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계신 분이었다.
결혼 8년차라니... 언제 그 세월이 지날까...
늦은 나이에 갓 결혼한 나는 8년이란 세월이 800년 쯤 되는 어마어마한
시간으로 느껴졌다.
그러던 내가 어느새 올 6월 16일로 결혼 11년째를 맞았다.
시어른들 생신 하나 제대로 못 챙기던 서툰 새신부는 그 사이 열한 살,
일곱살, 네살, 세 아이를 둔 주부가 되어 있었다.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세월이 돌아보니 꿈만 같다.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새색시가 되었던 나는 이제 감출 수 없이
흰머리가 늘어난 중년의 아줌마가 되어 있고, 수줍게 빙긋 웃기만 하던
남편은 40대 후반의 아저씨가 되어 있다. 11년은 확실히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결혼 두달만에 임신을 해서 그 이듬해 결혼 기념일을 이틀 지난 날에 태어난
큰 아이가 벌써 열한 살이다. 첫 아이의 나이만큼이 우리가 결혼해서 지내온 날들이다.
신혼의 단꿈에 빠져볼 새도 없이 첫 아이가 생겼고, 서툰 부모 노릇 하느라
걱정과 염려로 첫 아이를 키울때 남편은 정말 든든한 조력자였다.
병원이 아닌 조산원에서 출산을 하겠다는 마누라 말을 그대로 따라 주었고
진통할때도 탯줄을 자를때에도 남편은 함께 했었다.
퇴근하면 목욕탕에 수북히 쌓여 있는 똥기저귀를 일일이 칫솔로 털어서
비누칠해 빨고 들통에 삶아서 세탁기에 넣어 주는 궂은 일도 마다않고
열심히 도와 주었다. 동기들은 이미 초등학교 학부모가 된 나이에
첫 아들을 얻은 남편은 정말 기쁘고 행복하게 아들 돌보는 일을
도와주었다.
결혼 5년째에 집에서 둘째를 낳았을때도 잊을 수 없다.
너무나 바랬던 딸아이를 우리의 새집에서 낳았었다.
딸 낳고 일주일만에 전국출장을 떠난 남편때문에 가장 힘든 시기를
주말 부부로 지내야 했었지만 둘째는 아프지도 않고 잘 자라 주었다.
마흔에 낳은 셋째때는 내 몸이 많이 약했었다.
힘든 출산이었지만 남편은 막내가 너무 이뻐서 그 곁을 떠나지 못했었다.
큰 아이가 여섯살때 어렵게 공동육아를 시작하고 바로 말더듬이가 나타나서
언어치료를 받기도 했고, 가슴 설레며 첫 아이를 혁신 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2년만에 등교를 거부해 일반 학교를 떠나야 했던 고비들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남편은 내 선택을 믿어 주었고, 결국엔 내 뜻대로 따라 주었다.
돌아보니 정말 쉽지않은 일을 남편은 해 주었던 것이다.
살기 편한 아파트를 떠나 낡고 오래된 주택으로 이사하자고 했을때도
남편은 처음엔 심하게 반대했지만 결국엔 내 뜻을 받아 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200평 넘는 농사와 쉼없이 이어지는 집수리를 도맡아가며
집안의 가장 역할을 든든하게 해 내고 있다.
생각해보니 11년간 남편이 내게 얼마나 큰 울타리가 되어 주었는지
내가 얼마나 요구가 많고, 변화가 잦았으며, 큰 선택들을 남편에게 던져 주었는지
새삼 알겠다. 여기까지 올 수 있기까지 남편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해 주었는지도 알겠다.
늘 내가 더 힘들다고 불평하는 동안, 남편은 말없이 내가 벌이고 다니는 큰 일들을
수습해주었던 것이다.
이제 큰 아이는 대안학교를 잘 다닌다.
영리한 둘째는 설레는 마음으로 일반 학교에0 입학 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막내의 성장은 나날이 눈부시다.
아파트를 떠날때에는 두려움도 컸지만 주택에서 3년째 살면서
남편도 나도 서툰 농삿군이 되었고, 이젠 흙에서 멀어지면 살 수 없을 것 같이
자연이 좋아졌다. 아이들은 매일 매일 흙과 햇빛과 바람속에서 건강하게 잘 자란다.
큰 재산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큰 빚도 없고, 작지만 내집 한칸 가지고 있고
부끄럽지만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책 한권도 출간했고
매일 글을 쓰고, 서로를 알뜰히 아껴가며 살고 있으니
이만하면 11년동안 열심히 잘 살아온 셈이다.
앞으로 오는 날들도 살아온 날들만큼 열심히 즐겁게 힘내서
서로 사랑하고 도우며 가면 되겠지.
언젠가 아이들이 다 크면 다 함께 히말라야 트레킹을 가보자고
약속했는데 살다보면 그날도 분명 올 것이다.
감사해..11년..
앞으로오는 날들도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