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덜 깬 아이들을 들쳐 안고 나왔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국민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교도인 나라에서 크리스마스라니 안 어울리는 같지만, 사실 우리도 기독교인으로서 크리스마스를 기쁘게 맞는 것은 아니기에,
그래도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전 세계가 들썩들썩하는 즐거운 명절인데,
서울에서라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고대하며 눈 쌓인 설산을 보겠다고 강원도 쪽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소품들로 화려하게 치장한 들뜬 도시를 쏘다닐 것이니
우리도 오늘은 특별한 곳으로 떠나보자.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인터넷에서 심심치 않게 보는 소식, 지구 반대편에서 맞는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풍경을 떠올리며 작열하는 태양 아래 열대의 바닷가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즐거운 상상을 했다.
그래서! 서둘러 가야 할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페낭(Penang). 해변이 아름다워 동양의 진주라 불리는 그곳으로 가자!
카메런 하일랜드에서 아침 여덟 시 버스를 탔다.
페낭(Penanag)까지 다섯 시간 걸린다니 바닷가 호텔엔 늦어도 오후 서너 시쯤이면 도착하겠군. 도착하자마자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닷속으로 풍덩 뛰어들어야지. 훅훅 찌는 덥고 습한 날씨, 덥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시원하지도 않은, 뭔가 쾌적함과는 거리가 있는 카메런 하일랜드의 날씨를 견뎌온 보상으로 바닷물에 몸 담그고 신 나게 놀아주리라.
아직 컨디션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아이를 아침 일찍 깨워 길을 나서면서도 바닷가에 대한 열망으로 마음이 두둥실 떠올랐다. 열은 다 내렸으니 바닷가에서 쉬면 더 좋아지리라 기대하며.
마음 같아서는 빨리, 공간이동이라도 했으면 좋겠지만 언제나 현실은, 특히 여행지에서의 현실은 내 마음 같지는 않아서 약속시간보다 삼십 분 늦게 나타난 버스가 바로 출발하지 않고 시가지를 맴돌며 여기저기서 다른 손님을 태웠다.
올 때처럼 구불구불한 산길을, 이번에는 내려오는 데 비인지 안개인지 앞을 뿌옇게 가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긴장하고 조심해야 할 기사가 손전화에 대고 한참을 떠들고 나더니 옆에 앉은 조수와 쉬지 않고 잡담을 했다.
열대의 바닷가에 대한 핑크빛 환상이 안개 속으로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두어 시간을 달려 이포(Ipoh)라는 도시의 터미널에 내렸다. 버스를 갈아타야 한단다. 버스를 예약할 때 여행사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페낭으로 직접 간다더니.
하긴 여행사에서는 터미널에서 출발한다고만 했지, 시내를 돌며 손님을 더 태운다고도 하지 않았으니 그런 생각을 하면 중간에 또 어디를 들르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렇게 수다스럽던 기사가 버스를 갈아탈 거라고만 하고 자세한 설명도 없이 사라져 사람들이 버스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버스에서 짐을 내려야 하냐, 대체 어떤 버스로 갈아타는 거냐, 왜 갈아타라고 하는 거냐. 그래 봐야 내용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행하면서 무수히 겪은 비슷한 상황을 떠올리니 느긋해질 수 있었다.
대부분 이런 일은 현지 상황을 잘 몰라서 생긴다. 교통 상황이 좋지 않은 나라에서 여러 곳을 돌며 할 수 있는 한, 많은 손님을 태우는 것이 당연하리라. 손님의 환심을 사야하는 여행사에서 버스가 다른 곳을 들러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는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를 순순히 밝힐 이유는 없고.
다섯 시간 걸린다는, Direct라는 여행사의 말만 믿고 우리 식대로 생각하다가는 당황할 수 밖에.
이포(Ipoh)는 말레이시아 각 도시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인 듯, 행선지가 다양하다.
우리와 다르게 여행사마다 직접 호객행위를 하는 데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고 외치는 소리가 재미있었다. 마치 남대문 시장에서 골라, 골라, 하는 소리처럼.
가장 귀에 쏙 들어오는 말은 ‘쿠알라룸푸르, 께약께약께약~’ 이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께약이 케이엘(KL), 쿠알라룸푸르의 약자가 그렇게 들린 것 같다.
쿠알라룸푸르, 께약께약께약~ 아이들이 낄낄거리며 따라 했다. 이런 소리의 특징은 배우기 쉽다, 그리고 중독성이 강하다는 것.
께약께약께약은 페낭에 가서도 계속, 그 뒤로도 가끔씩 생각나면.
이포 터미널에서 아루가 신기해 했던 파란 소화기
페낭 대교를 건너 페낭 섬으로 간다. 버스에서 바라본 바다. 저 멀리 보이는 건 새로 짓고 있는 다리인 듯.
페낭의 숭아이 니봉(Sungei Nibong: 니봉 강) 터미널에 내리고 보니 네 시, 다섯 시간이면 도착할 줄 알았는데 벌써 여덟 시간이나 흐른 뒤였다.
이제 터미널의 버스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기다린다. 우리의 최종목적지, 탄중붕아(Tanjung Bunga) 해변까지 가는 104번 버스를. 해람이가 장거리 버스에서 멀미를 할까 봐 도착해서 늦은 점심을 먹기로 하고 모두가 하루종일 굶었다. 이포(Ipoh) 터미널에서 전날 밤에 준비한 옥수수와 고구마를 먹은 게 전부였다.
엄마, 배고파!
바닷가에 간다며, 도대체 언제 가는 거야???
당연히, 아이들의 원성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아이들을 위해서 목소리를 밝게 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나 역시 힘들고 짜증스러웠는데 그걸 들키지 않으려 무척 애를 썼다. 이포에서부터 시작된 두통이 점점 심하게 머리를 조여왔다. 혹시 버스 노선을 잘못 아는 게 아닐까?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고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대답이 신통치 않았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서 한국 사람을 발견하고 우리와 같은 버스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일단 안심이 되었다.
버스가 언제 오냐고 물어봐야 소용이 없다고 느꼈는지, 아루가 가방에서 색종이를 꺼내 묵묵히 종이접기를 시작했다.
여행하면서 기다림을 배운다. 아이들이 여행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바로 ‘기다림’이 아닐까? 돈 만 있으면, 도깨비 방망이로 뚝딱 하듯이 쉽게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세상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참고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기다림이란 책이나 누군가의 설명으로 배울 수 없고 온전히 자신의 경험으로만 배울 수 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참고 견디는 이 시간이 지루하고 힘들지만, 기다림을 체득하는 중요한 순간임을 깨닫는다.
여행에 대한 우리 나름의 원칙은, 빠름과 효율 그리고 돈으로 쉽게 얻을 수 있는 안락함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빨리, 서둘러 가기보다 아이들 걸음에 맞추어 느릿느릿 걷고 싶었다. 정상에 다다르진 못하더라도 오솔길에서 둘레둘레 걸으면 자연과 사람을 더 긴밀하게 만날 수 있으리라. 정상에 다다른 기쁨도 좋지만, 과정의 소중함을 함께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바로 눈앞의 택시에 올라 호텔 앞까지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하염없이, 끝까지 버스를 기다린 이유이다.
그렇다고 택시는 절대 안돼, 라고 생각지는 않았고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지닐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묵묵히 색종이를 접는 아이를 보니 조금 더 참아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한 시간 반 정도 기다려 버스에 올랐다. 두통이 더 심해졌다. 버스 뒷자리에서 해람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이제 다 왔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며 창밖으로 바다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러나, 버스가 페낭 섬의 중심지, 조지타운(George town)에 들어서자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진 탓인지 사람도 많았다. 심호흡하며 간신히 견뎠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 탄중 붕아의 호텔에 도착했을 땐 머릿속으로 그렇게 상상했던, 가까스로 도착했다는 안도감이나 기쁨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쳤다.
좌린이 아이들 데리고 밥을 먹을 가고 나는 침대에 누웠다. 보통 아이가 아프고 난 후에는 엄마들이 앓아눕는다. 아픈 아이를 돌보느라 자기도 모르게 몸과 마음을 많이 쓴 결과이리라.
그래, 이제 내가 좀 쉴 때가 되었구나, 생각하며 잠깐 눈을 붙였다. 잠시라도 쉬었더니 머리가 맑아져서 전화를 받고 식당을 찾아갔다.
아,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지!
호텔의 반짝이 장식을 보니 열대의 바닷가에서 색다른 추억을 만들어 보자던 애초의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아직은 늦지 않았어! 조금 더 힘이 나는 듯했다.
이슬람교도가 많지만, 이 나라도 ‘예수님의 탄생’과는 상관없이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분위기인가 보다. 호텔 레스토랑이 크리스마스 파티로 들썩였다.
물론 우리는 값비싼 호텔 레스토랑 대신 푸드코트에서 먹었다.
에너지가 금방 방전됐다가도 다시 쉽게 충전되는 아이들은 지금이라도 수영장에 뛰어들겠다고 야단이었으나 여덟 시가 지나 수영장을 이용할 수 없었다.
수영장 벤치에 앉아 밤바다와 호텔 레스토랑의 흔들거리는 크리스마스 불빛을 바라보았다.
예상과 달리 길에서 진을 다 빼고 무척 지치고 힘든 하루였지만,
아아, 그래도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서울에는 눈이 온단다.
페낭 밤바다~ 좌린이 여수 밤바다~ 노래를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다. 나직하게 들려오는 좌린의 노랫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 밤 마실 나가자!
해람이를 따라 밤바다 산책을 나갔다. 바닷바람 쐬며 맨발로 모래를 밟는 것도 좋았다.
손전등을 비추니 곳곳에서 게가 나타났다. 큰 것은 해람이 손바닥만한 것도 있었는데 우리 앞을 가로질러 쏜살같이 바닷속으로 혹은 구멍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내친김에 걸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대형 할인마트 간판이 어둠 속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융통성을 발휘하여, 할인마트에서 단 것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보기로 했다.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각자 먹고 싶은 것을 한 가지씩 골랐다.
엄마, 여기 봐!
마트에서 단감을 발견한 아루가, 제게 낯익은 과일과 포장지에 찍힌 한글을 보고 반가워 소리를 질렀다. 단감이라, 후후, 고향의 맛이지...
허나, 솔직히 좌린과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한국 라면!
십년 전에 세계일주 여행을 떠날 때 라면스프를 두둑히 챙겨갔다. 단골로 다니던 집 앞의 분식집에서 라볶이를 만들 때 스프를 쓰지 않고 버린다는 것을 알게 되어 모아 달라고 부탁을 했던 것이다. 매콤한 한국 음식이 그리울 때 뜨거운 물에 타서 국물을 마시거나 현지 라면을 사서 스프를 바꿔 끓여 먹기도 했다.
아이가 생기면서 라면을 멀리하고 있지만, 외국의 마트에서 한국 라면을 발견하니 무척 반가웠다. 예전 여행의 기억도 떠오르고.
아이들도 늦게까지 놀다 잠이 들었고 좌린과 나는 맥주를 홀짝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어쩌자구 편한 집 놔두고 이 고생이냐, 십 년 전과 달라지지 않은 레퍼토리,
그때와 마찬가지로 입으로는 궁시렁거리면서도 키득키득.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둘이 넷이 되었다는 것.
색다른 곳에서 크리스마스 이브를 즐겨보자는 계획을 제대로 이루진 못했지만, 우리 네 식구 지금 여기, 이국의 바닷가에 함께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했다.
카메런 하일랜드에서 다 못한 이야기
해람이는 밤에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타만네가라에서 카메런 하일랜드 가는 버스에서 내내 토하고 힘들어하더니만 막상 도착해서는 팔팔하게 잘 지냈다. 아루가 열이 나 아프고 나도 따라 골골하는 동안, 해람이는 좌린과 밤마다 마실을 다녔다. 어딜 그리 쏘다녔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해람이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니면서 햄버거도 사 먹고 카레 김치 만두(정확한 이름은 모른다. 인도 식당에서 파는 삼각형 모양의 만두 튀김인데 속에 커리와 야채가 들어 있단다. 입에 잘 맞았는지 페낭에 와서도 카레 김치 만두를 찾곤 했다.)도 먹었단다. 나 여기 어딘지 알아. 이렇게 가면 우리집(숙소) 근처잖아. 길 가면서 아는 척도 하고. 해람이는 아루와 달리, 늘 아빠보다는 엄마를 우선순위에 둔다. 아빠가 밤늦게 퇴근해 잠도 못 자고 우는 아이를 안아 재웠는데도, 잠 못 이루는 예민한 아이를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열심히 연구했음에도, 그런 아빠의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늘 아빠보다는 엄마란다. 좌린 입장에서는 서운할 수도 있을 텐데 솔직히 나는 이런 편애를 조금 즐기고 있었다. 엄마, 나랑 결혼하자,는 아이의 말에 해람아, 미안하지만 우린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야, 이런 농담도 즐기고. 여행하면서 아이들이, 특히, 해람이가 아빠랑 같이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이 두 남자가 둘이 캄캄한 밤에 쏘다니고 와서, 둘만 아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고백하건대, 그것은 질투심이었다.
좌린의 사진 파일을 들춰 보았다.
아, 이것이 해람이가 말한 그 햄버거로구나.
햄버거 가게 주인인가봐
카레 김치 만두!
그런데 이런 두 남자의 우정어린 밤마실을 경계하는 이가 나 말고 또 있었으니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아빠는 내 편에 가깝다는 심증을 가지고 있던 딸래미!
머리 아프다면서 누워 있지 못하고 두 남자의 밤 마실을 따라나섰다. 문구점에 들러 원하는 스티커, 그림 그릴 종합장을 득템 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