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놀이터 전문가들, 국제심포지엄
함께 타는 그네, 풍차 재활용, 위험 감수한 모험, 자연 그대로…
어른들 제약은 없애고 비와 바람과 햇빛과 자유의 공기 가득
» 여러 명이 탈 수 있는 그네. 수전 지 솔로몬 제공.
한국의 놀이터는 왜 이렇게 똑같고 지루할까? 전문가가 아니라도 놀이터에 가본 이들은 누구나 미끄럼틀과 시소, 그네로 구성된 한국 놀이터가 개성도 없고 아이들에게 전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의 놀이터 흐름은 어떨까? 지난달 26일 순천만국제습지센터 콘퍼런스홀에서 열린 ‘어린이놀이터 국제심포지엄’에서 강연을 한 세계적인 놀이터 전문가들이 청중들에게 보여준 놀이터들은 그야말로 다양하고 개성 넘치는 놀이터였다. 혼자만 타는 미끄럼틀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탈 수 있는 미끄럼틀, 위험을 다룰 수 있고 도전이 가능하도록 불놀이나 톱질할 수 있는 놀이터, 산업 폐기물들을 적절하게 바꿔 훌륭한 놀이터로 바꾼 사례, 자연을 그대도 옮겨심은 것과 같은 놀이터 등등 다양한 놀이터들이 존재했다. 눈길 끄는 세계적 놀이터의 흐름을 정리했다.
단돈 2만원짜리 합판으로 함께 만들고 함께 타
한국의 놀이터에서 볼 수 있는 미끄럼틀이나 그네는 혼자 타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좋은 놀이터가 갖춰야 할 요소 중 첫 번째는 함께하는 즐거움과 협동을 배울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함께 타는 시소나 미끄럼틀이 왜 없나?’라는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실제로 여러 나라에서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이 함께 탈 수 있는 미끄럼틀과 그네가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20세기 건축물에 대해 천착해온 예술사학자이자 <놀이의 과학>의 저자 수전 지 솔로몬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한 거리 모퉁이에 설치된 특대형 그네와 영국의 런던 해크니 프램턴 파크 주택 단지에 있는 양동이 그네를 소개했다. 넓은 양동이처럼 생겨서 여러 명이 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이 그네는 10대 청소년들에게 인기다. 10대들은 이 특대형 그네에 몇 명이나 탈 수 있는지 시합을 벌이기도 하고 자기네들이 고안해 낸 의식을 통해 최소한 한 명을 뽑아 그네를 밀게 하고 나머지는 발판을 마구 흔들어 댄다. 솔로몬은 “친구들과 함께 힘을 모아 그네가 높이 올라가면 아이들의 희열감과 성취감, 공동체 의식을 경험한다”고 말했다. 함께 탈 수 있는 그네의 소재로 낡은 타이어도 유용하게 활용된다. 네덜란드 회사 아카시아 로비니아는 혼자 탈 수도 있고, 여러 명이 탈 수 있는 타이어 그네를 판매한다. 아이들이 아무리 세게 흔들어도 타이어 두 개가 서로 부딪치는 일은 없지만, 부딪칠 듯 말 듯 하는 모습 속에서 아이들은 스릴감을 만끽할 수 있다.
놀이 운동가이자 순천 ‘기적의 놀이터’ 총괄 디자이너를 맡은 편해문씨는 귀촌한 지 12년째다. 편씨의 마당에는 단돈 2만원짜리 너른 합판으로 만든 폭넓은 미끄럼틀이 있다. 우연히 집 마당에 싣고 온 이 합판을 편씨는 아이들과 함께 미끄럼틀로 변신시켰다. 합판은 너무 낭창거리기 때문에 뒷면에 나무를 덧대어 한쪽이 울거나 덜렁거리지 않게 지지 구조를 만들었다. 딸은 튀어나온 못을 망치질했다. 동네 아이들과 모서리를 사포로 부드럽게 만들었다. 어른과 함께 만든 이 넓은 미끄럼틀에 아이들은 열광했다. 편씨는 “어설픈 미끄럼틀이지만 함께 만들고 함께 놀 수 있어 아이들은 열광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편씨의 마당에 있는 이 폭넓은 미끄럼틀은 일본의 모험 놀이터에서도 흔하게 만날 수 있다.
» 모험 놀이터에서 한 아이가 톱질을 하고 있다. 아마노 히데아키 제공.
불 피우고, 구덩이 파고, 공작…칼, 톱, 망치, 삽 등 상비
불을 피우고, 구덩이를 파고, 나무에 오르고, 기지를 만들고, 댐을 만들고, 요리를 하고, 공작을 하는 곳. 이 모든 것들이 어린이 스스로 하는 곳이 바로 일본의 모험놀이터(혹은 플레이파크)이다. 이 놀이터에서는 당연히 칼이나 톱, 망치, 삽 등의 도구나 공구류가 놀이터에 상비돼 있다. 팽이치기, 못빼기, 술래잡기와 같은 전통적인 놀이도 일상적으로 이뤄진다. 1979년 도쿄 세타가야 구의 하네기 공원 안에 첫 상설 모험놀이터가 생긴 지 벌써 37년째에 접어들었다. 현재 세타가야 구 안에는 4군데의 모험 놀이터가 만들어져 상설 운영중이다. 특정비영리활동(NPO) 법인 ‘일본모험놀이터만들기협회’ 이사인 아마노 히데아키는 “전국에 연간 4~5회 정도씩 부정기적으로 활동하는 곳을 포함한다면 일본에는 모험 놀이터가 400곳 정도 되고, 상설로 운영되는 곳은 100군데 정도”라고 말했다.
모험놀이터는 ‘자신의 책임으로 자유롭게 논다’는 취지로 어른들의 불필요한 금지나 제약을 없앤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아이가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현할 수 있도록 놀이활동가(플레이워커)가 적극적으로 지원해준다. 모험놀이터는 장소와 최소한의 운영 자금은 구에서 지원하고, 일상적인 운영은 지역 주민들이 책임을 지고 참여하며, 놀이활동가라 불리는 어른이 상주하는 구조로 운영된다.
아마노는 “어른들은 아이들이 하는 놀이에 대해 위험하다, 더럽다, 시끄럽다고 말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한다”며 “어른의 요구에 순응만 하는 아이는 자신이 스스로 삶을 주도할 수 있는 감각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했다. 아마노는 ‘구덩이를 파는 일은 재밌으니까 (어른들이 뭐라고 해도) 하고야 만다’는 아이들은 보기 힘들고, ‘구덩이 파기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하지 않는다’라고 교육받은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을 우려했다. 무엇인가를 스스로 해보고 싶다는 호기심, 의욕, 욕구가 용솟음치는 아이로 만들려면 놀이터 환경부터 바꿔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모험놀이터의 첫 번째 놀이활동가였던 아마노 히데아키는 “구덩이를 파서는 안 된다는 어른이 있으면, 아이가 구덩이가 파고 싶어하는데 왜 팔 수가 없는 거냐고 어른 사회에 대해 질문하고, 어떻게 하면 팔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고 실천하는 그런 사람이 놀이활동가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 풍차 날개를 이용한 놀이터. 수전 지 솔로몬 제공.
산업 폐기물 재활용해 보드도 타고 낙서도 하고
폐품을 재활용하거나 낡은 재료의 용도를 전환하거나 새 것이라 하더라도 값싼 재료를 구입해 사용한 놀이터도 세계적 놀이터의 흐름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는 설계회사 수페루세 스튜디오가 폐기 처분되는 풍차 날개를 구해 놀이터에 배치했다. 풍차 날개는 10년에서 15년만 지나면 교체하기 때문에 네덜란드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다. 트럭에 실어 운반하는 비용만 있으면 된다. 네덜란드에서 매년 폐기 처분돼 소각로로 향하는 풍차 날개는 2만 개에서 4만5천 개에 이른다. 재활용은 유해 물질 배출도 줄여준다. 놀이터 용도로 전환된 풍차 날개는 3~4년마다 한 번씩 새로 페인트칠을 해줘야 하지만 그것 말고는 유지비가 전혀 들지 않는다. 2012오르키텍텐(현재는 수페루세 스튜디오) 수석건축가였던 체사레 피렌은 놀이 구역에 각각 35미터 길이의 풍차 날개 다섯 개를 느슨한 격자 꼴로 겹쳐 배치했다. 날개 곳곳에는 1.4m 지름의 구멍을 뚫어 아이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 놀 수 있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풍차 위에 오르고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등 즐겁게 뛰어논다.
» 석유 탐사기를 활용한 놀이터. 수전 지 솔로몬 제공.
노르웨이 건축가 집단 옐렌&요르트는 근처 석유 채굴장에서 나오는 산업 폐기물을 용도 전환해 십대를 겨냥한 놀이터를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스케이드보드도 타고 낙서도 할 수 있는 공간이 많다.
» 쓰러진 나무도 아이들의 놀이터가 될 수 있다. 수전 지 솔로몬 제공.
다양한 돌, 썩어 넘어진 나무, 헝클어진 덤불…
자연은 아이들에게 매우 훌륭한 놀이터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현대의 아이들은 자연에서 멀어지고 콘크리트 투성이인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솔로몬은 “고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연은 특히 유아들에게 완벽한 환경을 마련해준다”고 말한다. 자연은 불규칙성과 의외성과 대면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 옐레 네벨롱이 설계한 덴마크 코펜하겐의 무레르요르덴 학교. 옐레 네벨롱이 2005년에 찍은 사진. 소나무 제공.
덴마크 건축가 엘레 네벨롱은 자연놀이터라는 틀 안에서 꾸준히 작업해오고 있는 건축가이다. 그는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온몸과 마음을 다해 끊임없이 주변 환경을 탐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네벨롱이 설계한 코펜하겐의 무레르요르덴 학교의 자연놀이터는 매우 인상적이다. 종류가 다양한 돌로 위층과 아래층을 연결해 지형과 질감의 변화를 꾀했다. 아래층의 물놀이터는 또 다른 종류의 돌과 나무로 윤곽을 잡았다. 숨바꼭질과 탐구 활동에 적합한 우거진 덤불이 눈에 쏙 들어온다. 물놀이터 근처의 버드나무는 예술 수업 소재를 제공한다.
» 바위 등을 활용한 놀이터. 수전 지 솔로몬 제공.
수전 지 솔로몬은 “미국에서는 자연 놀이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보니 ‘자연 놀이’라는 용어가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녀는 “콘트리트로 만들었는데 나무처럼 치장을 해놓았다. 나무 둥치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가짜 나무다. 이런 거짓말은 치사하다. 아이들은 분명히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그는 훌륭한 자연 놀이터는 썩어서 넘어진 나무나 자연 재해로 인해 헝클어진 나뭇가지 덤불을 활용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편해문 놀이터 디자이너는 “놀이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와 바람과 햇빛과 자유의 공기”라며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가짜가 아닌 실제를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