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둘, 아내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올해 4살인 막내가 “놀이터다!”라고 외치는 바람에 차에서 내려 놀이터로 들어섰다. 더위가 언제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아이들이 밖에서 딱 놀기 좋은 계절이 다가왔다. 날씨가 더워 밖에서 놀 수 없다며 아이들을 실내에 머물게 했던 어른들을 넌지시 바라볼 참이다. 이 가을에는 또 무슨 핑계로 아이들 놀이를 막아설지 말이다. 이때 어울리는 말이 있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아이들이 놀기에 좋지 않은 날씨는 없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계절과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놀 수 있다고 응원하는 한 사회의 메시지임이 틀림없다.
놀이터로 들어서니, 흔한 놀이터이지만 아이는 내달리고 흔들고 기어오르고 탄다. 몇몇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에 나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의 어린이 놀이터에서는 흔한, 좀 ‘기묘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아이 곁을 떠나지 않거나 졸졸 따라다니는 부모들이다. 아이들이 다칠까봐 그러는 것이다. 부모는 아이들을 당연히 보호해야 한다. 부모의 보호본능은 존중되어야 하고 그 심정을 헤아려야 한다. 문제는 그 시간이 한없이 길다는 점이다.
상당히 큰 아이인데도 아이 곁을 지키려는 부모들을 한국의 어린이 놀이터에서 수없이 맞닥뜨린다. 갓난아이이거나 영아의 경우는 마땅히 가까이서 보살펴야 한다. 그런데 안전검사를 모두 통과한 놀이시설이 있는 공공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쫓아다니며 챙기는 부모의 모습을 볼 때 지나치다는 생각을 지나 안쓰럽다는 마음이 든다.
![sporter-937066_960_720.jpg sporter-937066_960_720.jpg](http://babytree.hani.co.kr/files/attach/images/72/617/480/sporter-937066_960_720.jpg)
여기에 심각한 불일치가 존재한다. 아이들한테는 평지와 다르게 울퉁불퉁하고 덜커덕거리고, 해보고 싶은 행동을 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그곳이 놀이터이다. 아이들한테 오히려 이런 세계가 가장 큰 배움의 장일 수 있다.
한 부모에게 용기를 내어 말을 건넸다. “아이가 참 잘 올라가네요. 엄마 아빠가 조금 떨어져 아이를 본다면 아이는 더욱 자기가 하고 싶은 놀이에 집중할 수 있을 텐데요.”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하시리라. 아니 어떤 경우에는 싸우자는 이야기로 전달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뜻밖의 말을 들었다. “맞아요. 아이들은 믿고 지켜봐줄 때 더 열심이더라고요.” 가슴을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