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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강희
벚나무는
가로줄을
몸에 긋고
―난 가로쓰기가 좋아
은행나무는
세로줄을
몸에 긋고
―난 세로쓰기가 좋아
하지만 난
그냥 줄 없이
내 맘대로 쓰는 게
제일 좋은걸
<뒤로 가는 개미〉(문학동네 2015)
아이들도 사과 달린 것 보면 금세 그 나무가 사과나무임을 안다. 앵두나무, 포도나무, 복숭아나무, 배나무, 밤나무, 감나무, 모과나무 같은 과일나무가 다 그렇다. 열매가 열리기 전에는 꽃 보고 안다. 동백, 매화,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나무처럼. 솔잎, 은행잎, 단풍잎은 그 자체가 나무의 명찰이다. 그럼 열매도, 꽃도, 잎마저 없는 겨울엔 나무 이름을 어떻게 알까. 나무껍질 무늬, 색깔, 가시의 유무, 나무 모양 등 여러 특징을 살피면 되는데, 눈썰미가 생길 때까지 반복하여 보는 게 좋다.
‘쓰기 연습’은 벚나무와 은행나무의 껍질 무늬를 공책의 가로줄과 세로줄로 읽은 데서 출발한다. 벚나무는 가로쓰기를 좋아하고 은행나무는 세로쓰기를 좋아한다는 재미있는 결론으로 나아갔다. 천진한 눈이 아니라면 얻기 어려운 발견이다. 하고 싶은 말은 3연에 담았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게 제일 좋다는 아이의 독백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아이랑 같이 가까운 공원에 나가 나무껍질 무늬를 살펴보자. 느티나무에는 가로줄이, 아카시아, 참나무에는 세로줄이 그어져 있다. 플라타너스, 소나무, 모과나무처럼 말풍선 모양이 그려진 나무가 있는가 하면, 줄 없이 맘대로 쓰는 걸 좋아하는 나무, 군데군데 형광펜 긋는 걸 좋아하는 나무, 검은 종이를 고집하는 나무, 흰 종이를 고집하는 나무도 보인다. 맘에 드는 나무를 만나거든 두 팔 벌려 안아주고, 안기고 가자. 그때 한 가지 소원을 나무에게 속삭이는 것도 잊지 말자.
나무도 사람처럼 어릴 적엔 줄이 없다가 어느 정도 자라면 조심스레 점선이 생기고, 그 점선이 가로줄, 세로줄을 만들며 점차 뚜렷해진다. 나이 든 나무일수록 줄이 굵고, 줄 사이 골도 깊다. 탈선과 파격의 흔적도 곳곳에서 목격된다. 많은 벚나무가 가로쓰기를 좋아하지만 어떤 벚나무는 줄 자체를 지워 버리기도 한다. 벚나무와 은행나무만 다른 것이 아니다. 벚나무는 벚나무끼리, 은행나무는 은행나무끼리 서로 다르다. 생을 향한 의지와 고난이 충돌하고 그에 대한 골똘한 응전의 자국이 바로 나무껍질 무늬가 아닌가 싶다. 고집과 선호, 좌절과 일탈, 간섭과 저항, 어쩔 수 없는 수긍의 자국이 나무껍질에는 새겨져 있다.
잎과 꽃과 열매의 시절을 나무의 가장 빛나는 얼굴이라고 한다면, 빛이 모두 빠져나간 헐벗은 겨울에도 그의 빛나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것이 사랑이겠다. 잊지 않는 한 사랑은 다 가버린 것이 아니다. 매번 다시 오는 것이다. 2015년 늦가을, 학교 울타리에 핀 개나리꽃 두 송이는 노란 봄날 전학 간 친구 ‘민주’의 이름을 떠올리게 했다.
너랑 나랑 노랑이안꽃이 진 날에도내 이름 기억할 거지?늦가을학교 울타리에 핀 개나리꽃두 송이너랑 나랑 노랑봄에 한 약속민주야꽃이 진 날에도내 이름 불러줄 거지?
유강희 시인은 지금까지 세 권의 동시집을 냈다. 〈오리 발에 불났다〉(문학동네 2010)와 〈지렁이 일기예보〉(비룡소 2013)는 초등 1-2학년부터, 〈뒤로 가는 개미〉(문학동네 2015)는 5-6학년부터 읽기에 알맞다. 올해 세 줄짜리 ‘손바닥 동시’ 100편을 모아 〈손바닥 동시집〉을 출간할 예정인데, 거기서 한 편 소개한다.
금붕어유강희단풍잎 한 마리단풍잎 두 마리어, 가을이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