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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누구나 시인, 처음이어서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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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의 동시사용설명서]

사본_aa99904192301i77.jpg»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가시
/박성우
 
 
요건 찔레고 조건 아카시아야.
잘 봐, 꽃은 예쁘지만 가시가 있지?
 
아빠 근데, 찔레랑 아카시아는
이름에도 가시가 있는 것 같아.
 
〈우리 집 한 바퀴〉(창비 2016)





 


 안개가 자욱하게 낀 아침, 창밖을 보던 아이가 놀란 목소리로 엄마를 소리쳐 부른다. “엄마, 엄마 이리 와 봐. 구름이 터졌어!”(장옥관, ‘안개’) 아이를 업어 주며 아빠가 말한다. “나중에 아빠 늙으면 규연이가 업어 줘야 해.” 아이가 대답한다. “그래, 알았어. 근데 아빠, 아빠는 할머니 몇 번이나 업어 줬어?”(박성우, ‘몇 번이나 업어 줬어?’) 아이랑 아빠가 운전기사 놀이를 한다. 아이는 택시기사, 아빠는 손님. 택시비가 너무 비싸다며 좀 깎아 달라고 하자 아이가 말한다. “안 돼요. 칼이 없어요!(이안, ‘다섯 살’)

아이 입에서 시적인 표현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어른에겐 너무 익숙해서 의심 없이 받아들인 일을 아이는 처음 겪어서 처음으로, 첫으로, 새롭게 말한다. 몰라서일 수 있지만 모르기에 새롭다. 찔레는 ‘찌르다’, ‘찔리다’란 말을 연상시킨다. 아카시아에는 ‘카시’가 있다. ‘ㅉ’은 된소리고, ‘ㅋ’은 거센소리다. 그렇지 않은 소리보다 뻣뻣하고 앙칼지게, 경직되고 격하게 들린다. 아이는 그것을 직감하고 직관하여, “찔레랑 아카시아는/ 이름에도 가시가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우리 집 한 바퀴〉에는 박성우 시인이 딸 ‘규연’이에게서 얻어들은 말이 많다. 아빠가 시인이 아니라면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고 말았을 말이, 시로 거듭났다. 집에 아이가 있다면 시인이 있는 것이다. 어린 시인의 말을 받아 적는 공책 한 권을 준비하자. 아이가 흘린 시를 은행잎처럼, 꽃잎처럼 공책에 담아두자.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 처음인 말을, 이상한 말을 받아 적자. 부지런히 받아 적는 엄마 아빠도 어릴 적엔 다 시인이었다.

동시를 쓰는 시인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어른이어서 아이의 말과 마음, 생각에 이르기가 쉽지 않다. 때 묻은 생각을 툭 턴, 방법적 무지가 필요하다. 동시는 “소인국 이야기”(송찬호, ‘채송화’)여서 동시를 쓰거나 읽을 땐 어른의 의자를 치우고 아이 키에 맞게 쪼그려 앉아야 한다. 작은 존재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맞이하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세상과 인생의 두께를 보여주기도 한다.  

 바다
/박성우
 
 
바다가 생각보다 얇네.
 
그래? 키가 크면 좀 더 두꺼워 보일 거야.
 
……
 
봐, 아빠가 안아서 보여 주니까 바다가 엄청 두껍지?
 
내가 그냥 볼 땐 바다가 얇아 보였는데
아빠가 안아서 보여 주니까 바다가 두꺼워 보였다.
 
〈우리 집 한 바퀴〉(창비 2016) 

 

바다를 처음 보았을 때, 아이 입에서 나온 말이 시다. “바다가 생각보다 얇네.” 아빠는 이 말이 곧 태어날 시의 첫 말임을 알아차린다. 2연은 아빠가 쓰고(“그래? 키가 크면 좀 더 두꺼워 보일 거야.”), 3연은 아빠가 아이를 안아 올리면서 몸으로 썼다(“…….”). 4연에서는 아빠가 2연의 의미를 보강하면서 확대 심화했고, 5연은 아이가 정리하는 말로 맺었다. 아이와 아빠가 함께한 시 잇기 놀이가 뿌듯하다. 이 작품은 동시가 아이에게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면서 동시에 아이의 눈높이를 어른 키만큼 들어 올려 세상과 인생의 두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암시한다.    

 

박성우 시인은 시와 산문, 동시와 청소년시, 그림책 글까지 쓰는 전업 작가다. 2010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청소년시집 〈난 빨강〉(창비)을 냈고, 최근엔 어린이 감정 사전 〈아홉 살 마음 사전〉(창비 2017)을 냈다. 첫 동시집 〈불량 꽃게〉(문학동네 2008)와 지난해에 한꺼번에 출간한 동시집 〈우리 집 한 바퀴〉, 〈동물 학교 한 바퀴〉(창비)는 초등 1학년부터 재미나게 읽을 수 있다. 지난 2월에 나온 두 번째 청소년시집 〈사과가 필요해〉(창비)에서 한 편 소개한다. 청소년시집에 실렸지만 동시로 읽어도 좋고 시로 읽어도 좋은 작품이다. 청개구리 울음소리를 청매실로 육체화한 점이 절묘하다. 시가 경쾌한 음악이 된 경우다.   

 

유월 소낙비

/ 박성우

 

 

청개구리가 울음주머니에서 청매실을 왁다글왁다글 쏟아낸다

 

청개구리 울음주머니에서 닥다글닥다글 굴러 나오는 청매실,

 

소낙비가 왁다글왁다글 닥다글닥다글 왁다글닥다글 자루에 담아 간다

 

〈사과가 필요해〉(창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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