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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랑하고, 발랄하게… 말놀이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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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불고.JPG

정유경

 

동네에선 알아주는 싸움 대장

수업 시간엔 못 말리는 수다쟁이

동수 장난이 하도 심해 혀 내두른 아이들도

수십 명은 되지아마?

난 도무지 이해가 안 가그런 동수를

좋다고 쫓아다니는 여자애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참 한심해.

좋아할 남자애가 그리도 없나?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 

 

―〈까불고 싶은 날(창비 2010)


다음 말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기러기, 내 아내, 다가가다, 다시 합창 합시다, 토마토, 소주 만 병만 주소, 우병우. 앞에서 읽어도 말이 되고 뒤에서 읽어도 말이 된다. 회문(回文, 팰린드롬 palindrome)이라고 한다. 이와 달리 문자의 순서를 바꾸는 것은 어구전철(語句轉綴, 애너그램 anagram)이라 하는데, ‘굴비비굴로 쓰거나 개미미개로 쓴다든지, ‘부처님 신오 날’ ‘키노피오’ ‘나의 살던 고은향’ ‘메리 크마스리스처럼 말의 위치를 슬쩍 바꾸어 놓는 방식이다. ‘소년의 받침 을 앞으로 옮기면 손녀가 된다. ‘정말절망이 되고, ‘기침김치가 된다. 다른 사람을 문전박대하면 대박전문이 될 수 없다.


이 시의 비밀은 무엇일까? 얼핏 보면 동수를 짝사랑하는, 어린이 화자의 속마음이 비밀인 것처럼 읽힌다. 그런데 세로로 배치한 제목이 눈길을 끈다. 왜 그랬을까? 각행 첫 글자를 연결하면 동수 동수 난 좋아 참 좋아!’가 된다. 들키고 싶지 않지만, 은근히 들키고도 싶은 이중적인 마음 상태를 적절한 형식에 감춰 두었다. 흔히 세로 드립’, ‘세로 반전이라고 하는, 이합체시(離合體詩, 어크로스틱 acrostic)를 활용한 말놀이임을 알 수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형태가 삼행시 짓기다.


아이들과 함께 해볼 만한 말놀이, 글자놀이는 무궁무진하다. ‘아빠가 죽을 드신다를 잘못 띄어 쓰면 아빠 가죽을 드신다가 된다. 띄어쓰기 놀이이다. ‘무거웠는데 네가 들어주니까 처럼 가벼워졌어’(여기서 는 짐을 들어주려고 손을 내민 모양)는 모음의 모양을 활용한 글자놀이이다. 말과 글에 도 없고 도 없으면 밋밋하기(정유경, ‘소중한 점 하나’) 십상이다. 윗사람에게 보내는 이메일 말미에 이안 올림이안 놀림으로 잘못 써서 화들짝 놀란 적도 있다.

worry-about-hog-2096331_960_720.jpg» 사진 픽사베이.

어구전철과 비슷한 형태로 글자 뒤집기 놀이를 할 수도 있다. ‘을 뒤집으면 이 되고, ‘곰국의 순서를 바꾸어 뒤집으면 논문이 된다. 한글과 아라비아 숫자를 섞어 쓰며 놀 수도 있다. 초등 저학년 아이들은 하나‘1’, ‘다섯‘5’, ‘여덟‘8이라고 쓰기도 한다. 아래 두 작품은 이를 활용한 것이다.

 

른자동롬원

이안

 

절대 이 책릉 거꾸로 꽂지 마시오

 

문이 곰릉 열고 탈출할 수도 있믕

 

 

1학년

이안

 

 

세상은 참 궁금하고 2상해

 

아직 1어나지 않은 1들2 많거든

 

2렇게 쓸 줄도 안다니까

 

5섯 밤만 자면 내 생1

 

―〈글자동물원〉(문학동네 2015)


 

른자동롬원‘1학년의 표현방법을 활용해 문장을 써 보자. ‘5륵긍 부처님 5신 날, 절에 가서 부처님께 절릉 하고 부처님릉 룽려다보니까 부처님2 웃고 계셨다. 기분2 좋아서 나도 모르게 웃믕2 나왔다.’ 물구나무서도 말이 되는 글자를 찾아보자. 아라비아 숫자를 90도 돌려보고 180도 돌려보자. 모양이 달라지면서 어떤 그림이 나오는지 음미해 보자. 눈덩이를 뭉쳐() 눈덩이()위에 올려놓으면 ‘8’이 되고, 햇볕에 녹아 눈덩이 하나가 굴러 떨어지면 무한대()가 된다.(이안, ‘눈덩이’) 동시에서 2는 오리, 3은 개미로 표현되기도 한다. 알파벳 i는 촛불 모양을 닮았다.(추필숙, ‘i처럼’) 온점, 반점, 느낌표, 물음표, 말줄임표 같은 문장부호로도 놀 수 있다.


우리말 파자시(破字詩: 한자의 자획을 풀어 나누어 쓴 시) 놀이도 재미있다. ‘아주머니’ ‘주머니에는 머니아주많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할머니와 어머니와 아주머니에게는 머니가 있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저씨에게는 머니가 없다. ‘팽이의 이미지를 결합해 달팽이 시를 쓸 수 있다.(김륭, ‘달팽이’) 귀뚜라미, 맨드라미, 쓰르라미, 동그라미는 말꼬리가 같다. 쇠똥구리 말똥구리 멍텅구리에선 뭔가 구린내가 나는 것 같다. 무지개는 무지라고 생각해 본다.(곽해룡, ‘무지개’) 자라를 보면 왠지 자라야, 잠 좀 자라말하고 싶어진다.(최승호, ‘자라’) 시의 바탕은 말이다. 말을 요모조모 감각하고 이렇게 저렇게 갖고 놀아보는 것이 시 창작과 감상의 첫걸음이다.

 

정유경 시인은 지금까지 두 권의 동시집을 냈다. 까불고 싶은 날(창비 2010)까만 밤(창비 2013) 모두 초등 저학년부터 읽을 수 있다. 까불까불 맹랑하고, 발발발발 발랄하게 돌아다니는 여자아이를 만날 수 있는 동시집이다. 사랑에 빠진 여자아이의 살랑대고 촐랑거리는 속마음을 노래한 다음 작품은 각행 두 번째 글자를 으로 맞추었다. 이 작품 역시 제목 ‘_에 감상의 방향이 담겨 있다. 제목을 어떻게 달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정유경 동시를 읽는 재미 중 하나다.


_랑

정유경

 

낭랑한 네 목소리가 좋아.

명랑한 네 모습이 좋아.

너랑 매일 짝 하고 싶어.

너랑 매일 놀고 싶어.

살랑살랑살랑 봄바람처럼

촐랑촐랑촐랑 설레는 내 마음

자랑하고 싶어, 나는

사랑에 빠졌어.

 

―〈까만 밤〉(창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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