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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읽으면 좋을 동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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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1.JPG» 기적의 도서관 별관 뒤쪽에서 고양이가 엄마 고양이의 젖을 먹고 있다. 사진 정봉남.아침부터 아이들이 웅성웅성 별관 뒤쪽을 바라보며 모여있었다. 무슨 일이야? 약속한 듯 모두들 목소리를 낮추어 새끼 고양이가 태어났다고 알려준다. 두 손을 모아 눈썹에 붙이고 바라본 유리창 너머로 아기고양이 세 마리가 엄마 젖을 먹고 있었다. 노랑 아기는 인기척에 놀라 저멀리서 고개만 빠끔 내밀고, 검정 아기는 아랑곳 않고 젖먹기에 여념이 없고, 엄마 고양이는 긴장한 듯 귀를 쫑긋 세우고 우리를 건너다봤다. 

“세 마리야?” “아니요, 새끼가 다섯 마리예요.” “정말? 나머지 아기들은 어디있지?” “무서워서 숨었어요. 마당으로 나갔어요.“ ”너무 귀엽죠?“ ”응.“
 
보송보송한 아기 고양이들도 귀엽고 창가에 오종종 매달려 바라보는 아이들도 귀엽다. 도서관 마당을 우아하게 거닐던 그 얼룩 고양이가 새끼를 낳은 것이다. 다섯 마리를 다 확인하진 못했지만 왼종일 그렇게 창가에 매달려있어도 심심하지 않았다. 급기야 쪼그리고 앉은 다리가 저려서 아고고 소리를 내면 고양이들이 깜짝깜짝 놀라니 쉬쉬 해가며 다리를 주물렀다.
고양이2.JPG» 기적의 도서관 별관 뒤쪽에서 새끼 고양이 세마리가 엄마 고양이의 젖을 먹고 있다. 사진 정봉남
오늘의 최고 뉴스는 이렇게 발견한 고양이 가족! 새끼 고양이와 엄마 냥이를 보겠다고 아이들은 번갈아가며 젖먹이는 모습을 훔쳐봤다. “우리 그만 보자. 얘네들도 편히 쉬어야지.” 부러 아이들을 돌려보내면서 나 역시 자꾸만 마음이 그쪽으로 쏠리는 걸 어쩌지 못했다. 

고양이 가족을 보니까 입에서 톡! 하고 튀어오른 동시가 있다. 이안 아저씨의 <고양이의 탄생>이다. “고양이 다섯 마리가/태어났어요//입에/조붓한 길을 하나씩 물고요//고양이에게는 도무지/걱정이 없습니다//고양이는/길을 물고 태어나니까요!”(‘고양이의 탄생’ 전문) 저마다 입에 조붓한 길을 하나씩 물고 태어났으니 걱정 없이 자기 길을 가겠지? 

며칠 뒤엔 도서관 뒤뜰 파출소 앞에서 옹기종기 뛰노는 아기 고양이들을 만났다. 자기들끼리 이리저리 뛰노는 모습이 자유롭고 신나보여서 기분이 좋았다. “아, 금세 이렇게 컸구나!” 반가워서 달려갔는데 아기 고양이들은 그 맘도 몰라주고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며 풀숲으로 퐁당 숨어들어갔다. 그래도 뭐 잘 크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KakaoTalk_20170831_100910948.jpg» 기적의 도서관에 나타난 고양이들. 사진 정봉남.
그때 이안 아저씨의 또 다른 동시집 <고양이와 통한 날>이 꼬리를 물고 톡 튀어올랐다. “책 읽는 앞에/고양이가 다가와 앉았다//‘고양아, 넌 정말 눈이 예뻐/그런데 눈에 눈곱이 끼었네……’/생각만 했는데//고양이가 갑자기 오른발로 왼발로/구석구석 세수를 하곤/고개들어 나를 바라보았다//눈곱 하나 없이 말끔한 눈으로//”(‘고양이와 통한 날’ 전문) 언젠가는 도서관 고양이들과 통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도망치지만 말고 같이 놀면 좋을 텐데...

뜨거웠던 여름의 끝자락, 아기 고양이들이 태어나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마치 “풀벌레소리요를 깔고/풀벌레소리이불 덮고/풀벌레소리잠을”자는 가을을 고양이가 물어다 준 것처럼. 불현듯 떠오른 짧은 동시 한 편은 내 마음 어딘가에 도른도른 숨어있다가 이렇게 한 번씩 반짝 깨어나곤 한다.  
KakaoTalk_20170831_100821202.jpg» 가을에 읽으면 좋을 동시집. 사진 정봉남.
내친 김에 가을에 읽으면 좋을 동시집을 꺼내본다. 가을볕처럼 따스한 동시집 한 권. 낡아서 빛바랜 종이에 책등을 덮은 진초록 띠가 단아하다. 오려낸 종이글자를 풀로 정성껏 붙이고, 색연필로 나뭇잎 그림도 그려넣었다. 세련되지 않아서 외려 정감이 가는 책갈피에는 세월의 얼룩마저도 곱게 감쌌다. `동시 삼베치마’라고 이름붙인 시집을 묶은 이는 권정생 선생님이다.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이땅의 아이들을 굽어보고 계실 테지만, 직접 펜으로 글을 쓰고 삽화를 그리고, 아홉 마디로 알뜰하게 부를 나누고, 풀을 붙여 제본까지 했다. 아, 이것은 세상에 단 한 권밖에 없는, 찬란하게 낡은 동시집이다. 
4_동시삼베치마.JPG
`삼베치마’에 실린 `강냉이’라는 시가 초등학교 때 쓴 것이니 권정생 선생님이 거의 육십 평생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동시집이다. `강아지똥’보다 5년 앞서 묶인, 한 번도 세상에 발표되지 않은 동시들이라니! 평생을 버리지 않고 마음 한편에 지니고 있었을 이 동시집은 권정생 선생님에게 무엇이었을까? 

“어린이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는 것 그리고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살아가는 모든 자연 속의 생물들도 같이 생각하면서” 글을 써야 한다고 했던 권정생 선생님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살아오는 듯하다. 잠에서 덜 깬 채 마당으로 세수하러 나오는 어린 권정생을 상상하니 미소가 머금어진다.

3_사비약.JPG 
아흔을 넘긴 할아버지 시인이 오래오래 이 세상에서 살아갈 어린 벗들에게 보내는 선물 보따리를 푼다. 정완영 시인의 동시조집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을 한 장씩 읽어가노라면 잘 익은 알밤처럼 오돌오돌 맛나고 씹을수록 고소하다. 입 안에 고이는 찰랑찰랑 맑은 소리, 마음에 차오르는 살랑살랑 고운 심상. 초록빛 실타래 같은 봄비에 젖었다가, 하늘 길목에 내걸린 등불처럼 환해졌다가, 바람결 좋은 날 머리 빗고 섰는 나무가 되었다가, 오소소 추워서 씨방 속에 숨은 꽃씨가 되어보는 경험을 어디서 해볼 수 있을는지….

“바람 한 점 없는 날에, 보는 이도 없는 날에/푸른 산 뻐꾸기 울고 감꽃 하나 떨어진다/감꽃만 떨어져 누워도 온 세상은 환하다.//울고 있는 뻐꾸기에게, 누워 있는 감꽃에게/이 세상 한복판이 어디냐고 물었더니/여기가 그 자리라며 감꽃 둘레 환하다.”(`감꽃’ 전문)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 안아주는 시의 언어들, 감꽃 둘레보다 환하고 그윽하다. 

2_ㄹ받침.JPG 
“끝소리 글자 / ㄹ 받침이 들어 있는 / 한 글자 우리 말 / 찾기 놀이 해 보자” 굴, 날, 달, 들, 말, 뜰, 설.....이렇게 찾아낸 ㄹ받침 한 글자가 무려 53개나 된단다. 이 글자들로 엮은 동시집을 펼치니 우선 그 숫자에 놀라고,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을까? 기특하기도 하고, 글자들을 가지고 시 놀이를 하다니 기발하고, 뭐 빠트린 건 없을까? 나도 한 번 찾아보고 싶어진다. 

“교실로 날아든/벌 한 마리//벌을 좇는/아이들의 눈동자//벌이 다가올 때마다/벌벌 떠네.”(벌 전문)라든가 “세모는 세모꼴/네모는 네모꼴/부채는 부채꼴//내 시험 성적은/요 모양 요 꼴//엄마가 꼴좋대/꼴도 보기 싫대//내 꼴이 처량해.”(꼴 전문)처럼 울림소리 자체의 힘도 있지만, 말을 이어받아 톡톡 쳐대는 솜씨가 참으로 즐겁다. 

후루룩 시원스럽게 읽어낼 수 있지만 자꾸만 다시 읽고 싶어지는 동시, 그림일기를 보는 듯 색연필 그림까지 곁들여져 후후 자꾸만 웃음이 걸린다. 

시를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은 뭘까? 새로운 시선, 즐거운 운율, 마음을 출렁이게 만드는 깨달음 같은 것이 아닐까? 꼼지락꼼지락 놀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는 아이처럼 자꾸자꾸 읽고 싶고 아예 외워서 들려주고 싶은 동시집을 만나 흠흠 기분이 좋다.

작가 김은영 선생님은 초등학교 1학년 담임이시다. 그래서인지 동시마다 귀엽고 개구진 1학년 아이들의 목소리가 생글생글 잡힐 것만 같고, 가족과 이웃들, 아이들 사는 모습, 자연과 사물의 아름다움이 온전히 빛나 보인다. 

1_똥누고.JPG 
시집의 맨 앞에 보면 임길택 선생님의 자필로 쓴 `바람 하나’ 있다. 
“내 잣대로 그 무엇이라도 재지 않을 수 있기를. 사람뿐 아니라 조그만 벌레 하나까지도”라고 씌어 있다. 울타리 쌓아 내 마당이라 여겼는데 똥 누고 가는 새가 그것은 산언덕 한 모퉁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깨워주는 시, 새 한 마리를 통해 이런 깨달음을 길어올릴 수 있는 마음을 가졌기에 이토록 순하고 아름다운 시를 세상에 남겼구나 싶어진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나누고 가르고 따지고 담을 쌓는 마음들에게 이 시를 들려주면 어떨까? 우리가 잃어가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멈추어 생각해 볼 일이다.   

<이따금 집 떠나/ 밥 사먹을 때// 밥상 앞에 두곤/ 주인 다시 쳐다봐요// 날 위해/ 이처럼 차려 주시나// 고마운 마음에/ 남김없이 먹고서// 빈 그릇들 가득/ 마음 담아 두어요>(`고마움’ 전문)  

임길택 선생님의 시는 “그저 가을날 혼자 피어 있는 들꽃처럼 가난할 뿐”이지만 참으로 아름답고 소박해서 들꽃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세상에 이렇게도 맑은 영혼이 쉼 쉬다 갔구나. 시인의 눈길이 닿은 모든 것들은 그의 노래로 다시 생명을 얻었구나.’ 그분이 살다간 세상의 한 귀퉁이에 우리가 살고 숨쉬고 있음이 감격스러워 아끼며 읽으면 좋을 동시집이다. 

*그림책 사진 정봉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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