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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우기 쉽고 외우고 싶은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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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JPG»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달력을 넘기며
권영상

지나간 달을 넘기고
새 달을 받는다.

이 아침
나는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서른 개의
깨끗한 날을 받는다.

달걀 한 바구니처럼
굵고 소중한 선물.

어미 닭이 달걀을 품듯
서른 개의 날들이
서른 개의 꿈으로 깨어나게 될 일을
곰곰 생각한다.

―〈아, 너였구나!〉(국민서관 2015)

그리 애쓰지 않았는데도 쉽게 외워지고 만나자마자 외우고 싶어지는 말이 있다. 시는 일상어보다 더 공들여 깎고 다듬고 어루만진 말로 이루어졌기에 잘 외워서 음악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싶어질 때가 많다. 가령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꽃”(고은)이나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나태주) 같은 시는 최근 몇 년 새 골목길 강아지나 고양이들도 외고 다닐 만큼 국민 암송시가 되다시피 했다.  

특정 시절이나 사물, 풍경이나 정서의 한 대목을 훔쳐낸 듯한 말일수록 암송을 유혹하는 힘이 세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로 시작하는 ‘성탄제’(김종길)가 떠오르고, 새해 아침에는 어김없이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로 시작하는 ‘설날 아침에’(김종길)가 떠오른다. 어쩌면 시인은 외우기 쉽고 외우고 싶은 한마디 말을 세상에 꼭 남겨두고자 소원하고 욕망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이제 얼마 안 지나면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서른 개의/ 깨끗한 날”이, “달걀”처럼 “굵고 소중한 선물”이 열두 바구니나 도착한다. 한 날 한 날이 “어미 닭이 달걀을 품듯” “꿈으로 깨어나게 될” 한 알 한 알이다. 그러니 새해 달력엔, 외우기 쉽고 외우고 싶은 동시를 적어 기념하도록 하자. 한번에 외워지게 다섯 줄 이하의 짧은 동시를 주로 하되 가끔은 열 줄 넘는 동시를 끼워 넣어도 괜찮다. 계절과 시절에 맞게, 식구들 기분과 필요에 맞게. 일주일에 한 편씩만 외워도 일 년이면 마흔여덟 편, 동시집 한 권이 만들어진다. 내년 이맘때에는 식구 수만큼 책으로 엮어 ‘우리 집 암송 동시집 2018’ 출간기념회를 열 수도 있다.  

쉽고 재미나게 외울 수 있는 짧은 동시 몇 편을 예시해 본다. 짧은 시는 제목과 본문을 잇대어 읽을 때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쾌감을 더 크게 맛볼 수 있다. 한 사람이 제목을 말하면 다른 한 사람이 본문을 말하는 식으로 해도 좋고, 그 역도 좋다. 권영상의 ‘풀벌레’는 근래 만난 ‘풀벌레 동시’ 중 가장 탐나는 작품이다.  

“선생님이 방귀 뀌는 걸 봤다.”(김개미, ‘선생님이 덜 무서워졌다’)
“나왔을 때가 제일 맛있다”(이안, ‘짜장면’)
“꽃은 꺾어 왔지만 나비를 데려오지는 못했네”(이안, ‘나비2’)
“앞에서 먹어도 토마토/ 뒤에서 먹어도 토마토”(유강희, ‘토마토’)
“그 많던 쇠똥은/ 다 어디로 갔을까?”(안도현, ‘쇠똥구리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
“걷다 보니// 모르는 데다.// 몰랐던 이야기가 걸어 나온다.”(송선미, ‘골목’)
“요번 가을에도/ 사과나무는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서// 단풍놀이 또 못 가겠다”(임수현, ‘단풍놀이’)
“흘러가는 물도 가끔씩/ 가만히 멈춰 서서/ 거울을 본다”(김륭, ‘얼음’)
“나누어 먹을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 요 작은 것이.”(권영상, ‘콩 반쪽’)
“풀벌레는/ 노래하는 음표//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숨어버리지./ 악보 속에.”(권영상, ‘풀벌레’)

새해를 앞둔 이맘때는 어쩔 수 없이 몇 꾸러미의 절망과 후회, 위안과 다짐이 교차한다. 후회하는 마음을 새로운 다짐으로 누르고 새해에는 어떻게든 “다른 모양”과 “색깔”과 “저만치 혼자”만의 거리를 확보한 “다른 꽃”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런 한편 어쩔 수 없이 거북이일 수밖에 없었던, 달팽이일 수밖에 없었던, 굼벵이일 수밖에 없었던, 바위일 수밖에 없었던 자기의 시간을 긍정하게도 된다. 

도라지꽃의 올해도 하는 절망
이안

올해는 정말 다른 모양으로 피고 싶었어

올해는 정말 다른 색깔로 피고 싶었어

올해는 정말 저만치 혼자서 피고 싶었어

올해는 정말 다른 꽃이 되고 싶었어

―〈어린이와 문학〉(2016년 7월호)


새해 첫 기적
반칠환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웃음의 힘〉(시와시학사 2005)


권영상 시인은 40년 가까이 동시를 써온 아동문단의 원로이다. 지금까지 펴낸 동시집만 열다섯 권이 넘는다. 젊은 시인도 쫓아가기 어려울 만큼 여전히 새로운, 우리 동시의 감각적 현재가 그의 동시에는 간직되어 있다. 정지용의 ‘별똥’처럼, 윤동주의 ‘호주머니’처럼, 권태응의 ‘감자꽃’처럼, 한하운의 ‘개구리’처럼, 이문구의 ‘산 너머 저쪽’처럼, 함민복의 ‘반성’처럼 외우기 쉽고 외우고 싶은 동시가 적지 않다. 다음 작품은 빼어난 마술처럼 아름다워 ‘우리 집 암송 동시집 2018’에 꼭 넣고 싶다.   

나비
권영상

손끝에 물을 찍어
책상에 나비를 그렸다.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들판으로
꽃을 찾아가는 나비.

얼핏
창밖으로
나비 한 마리 날아간다.

돌아보니
아, 책상 위에 그려 놓은
나비가 없어졌다.

―〈아, 너였구나!〉(국민서관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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