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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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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jpg»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씨갑시 할라고

송진권

 

 

할아버지 할아버지

허리 굽고 얼굴 얽은 곰보 할아버지

처마 밑 강냉이는 뭐 하려고

곶감 옆에 매달아 놓았나요

 

으응 그건 말이여

처마 밑 제비집에 제비가 오면

씨갑시 부칠라고 냉겨 둔 거여

 

*씨갑시: ‘씨앗’의 방언

―<새 그리는 방법>(문학동네, 2014)


할아버지(a)-할아버지(a)-할아버지(a)-할아버지(a). 같은 말을 네 번 반복하면 말 꾸러미가 탄력을 잃고 늘어져 버린다. 보통 세 번째 마디에 변화를 준다. 할아버지(a)-할아버지(a)-허리 굽고 얼굴 얽은 곰보(b)-할아버지(a). 말의 고삐가 팽팽해진다. 말이 꺾이는 데서 굴곡이 발생하며 대상은 세부와 구체를 입게 된다. 이런 형식은 고려가요(가시리-가시리잇고-바리고-가시리잇고)에서부터 김소월(꽃 피네-꽃이 피네-갈 봄 여름 없이-꽃이 피네)을 거쳐 김용택(콩 잡아라-콩 잡아라-굴러가는 저-콩 잡아라)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발견되는 반복 패턴이다.

 

송진권의 ‘씨갑시 할라고’는 묻고(1연)-답하기(2연) 형식으로 되어 있다. 아이가 묻고 어른이 답한다. 표준어(제도/근대/중앙/신세대) 대 사투리(비제도/전근대/지방/구세대)의 마주봄이다. 이웃 할아버지의 늙음(“허리 굽고”)과 장애(“얼굴 얽은 곰보”)를 놀려먹는 듯 시작한 시는 말랑말랑 달고 맛있는 곶감이 아니라, 그 옆에 매달아 놓은 깡마르고 딱딱한 강냉이의 쓰임새를 묻는 쪽으로 나아간다. 아이의 눈에는, 도무지 딱딱하기만 하여 영 쓸모없어 보이는 강냉이를 귀한 곶감 옆에 매달아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곶감이 ‘겨울-지금’의 쓸모라면 강냉이는 ‘봄-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쓸모다. 지금은 비어 있는 제비집에 다시 제비가 오면, 끝난 줄로만 알았던 이야기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빈 제비집, 깡마르고 딱딱한 강냉이, 허리 굽고 얼굴 얽은 곰보 할아버지는 제비, 씨앗, 아이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현재이자 미래의 몸이고 이야기이다.

 

aaba 구조에서는 b가 중요하다. a의 방향이 b에 담기기 때문이다. b를 채워 보자. 길어도 상관없다. 엉뚱할수록 재밌다. 말 꾸러미가 늘어지지 않도록 탄력을 불어넣어 보자. 엄마-엄마-(   )-엄마. 아빠-아빠-(   )-아빠. 놀아줘-놀아줘-(   )-놀아줘. 내 맘이야-내 맘이야-(   )-내 맘이야. 말하지 마-말하지 마-(   )-말하지 마. 

 

반복하면 강조된다. 토토토 토토토, 리듬이 발생한다. 음악은 시를 구성하는 세 기둥 중 하나다. 시는 리듬에 민감하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리듬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다. 리듬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운문과 산문이 갈린다. 끊어 읽기의 단위를 반복(음보율)하거나 글자 수를 반복(음수율)하는 것은 시조나 민요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방법이다. 같거나 비슷한 음운, 단어, 어구, 문장을 반복하거나 비슷한 구조를 마주보게 놓는 방법(대구), 처음과 끝을 맞추는 방법(수미상관) 등이 사용된다. 그러나 반복의 형식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호흡의 멈춤과 펼침, 길고 짧음의 조절로 감추어둘 수도 있다. 그런데 한 편의 시에서는 이런 것이 하나씩 분리되어 쓰이지 않고 매우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게 된다.


염소

정완영

 

염소는 수염도 꼬리도 쬐꼼 달고 나왔습니다

울음도 염주알 굴리듯 새까맣게 굴립니다

똥조차 분꽃씨 흘리듯 동글동글 흘립니다.

 

―〈가랑비 가랑가랑 가랑파 가랑가랑〉(사계절 2007)


시조다. 염소는/ 수염도 꼬리도/ 쬐꼼 달고/ 나왔습니다, 네 덩어리로 끊어 읽는 4음보율 외에 ㅇ, ㅁ, ㄹ 음, ㅉ, ㄲ, ㄸ 등 된소리, 조사 ‘-도’, “꼬리도” “굴리듯” “흘리듯”의 ‘리’와 ‘리듯’, 제목을 포함해 4번 반복되는 ‘염’, 각운 ‘-ㅂ니다’, 3·6·4·4의 음수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유기체임을 알 수 있다. 소설가 이문구 선생은 〈개구쟁이 산복이〉(창비 1988), 〈산에는 산새 물에는 물새〉(창비 2003) 등 동시집을 두 권 남겼는데 3음보, 대구를 절묘하게 구사한 작품이 많다. 〈개구쟁이 산복이〉에서 두 편 인용해 본다.


지름길

이문구

 

학교 가는 지름길은 황톳길

바람개비 돌아가는 바람길

굴렁쇠 굴리다가 밭을 밟고

어른한테 야단맞는 좁은 길.

 

학교 가는 지름길은 진창길

가오리연 걸려 있는 안개길

도란도란 얘기하며 한눈팔고

종소리에 달려가는 바쁜 길.

         

산 너머 저쪽

이문구

 

산 너머 저쪽엔

별똥이 많겠지

밤마다 서너 개씩

떨어졌으니.

 

산 너머 저쪽엔

바다가 있겠지

여름내 은하수가

흘러갔으니.

 

두 편 다 정확한 대구다. 반을 접으면 각 행의 겹침이 묘하게 맛있다. 기계적으로 맞춘 느낌 없이 자연스럽다. 말을 잘 부리면 틀을 입어도 입은 것 같지 않다. ‘지름길’의 각 행 끝 음보를 뽑아내면, ‘황톳길-바람길-밭을 밟고-좁은 길’(1연), ‘진창길-안개길-한눈팔고-바쁜 길’(2연)이다. aaba를 이렇게도 놓을 수 있음이 놀랍다. 제목에 사용된 말이 본문에 반복되는 경우는 흔하다. 


쳇바퀴

최승호

 

오늘 또 쳇바퀴 돈다

어제도 쳇바퀴 돌았지

그제도 쳇바퀴 돌았지

쳇 쳇

내일 또 쳇바퀴 돕니까

 


이 작품이 실린 책은〈말놀이 동시집 5〉(비룡소 2010)인데 ‘리듬편’이다. 이 짧은 시에 ‘쳇’이 열한 번, ‘쳇바퀴’가 다섯 번이나 쓰였다. 같은 책에 실린 ‘키위’에서 ‘키위’, ‘키’, ‘위’, ‘ㅟ’, ‘ㅝ’, ‘ㅣ’, ‘ㅋ’, ‘ㅇ’ 음이 사용된 빈도를 체크해 보자. 리듬이 우세하면 의미는 약화된다. “키위를 키워/ 키위를 위해 키위를 키워/ 키위 키위 키 크는 키위/ 키위가 열리는 키위/ 키위를 키워/ 키위를 위해 키위를 키워/ 키 클수록 사랑스러운/ 키위”. 무엇이든 너무 표 나게 하면 자연스럽지 못하다. 몰랐는데 따지고 보니 그렇구나, 하는 상태가 좋다. ‘안경원숭이’에 대해 쓰자면 ‘안경’, ‘안’을 중심으로 반복이 이루어진다. 


안경원숭이

이안

 

사람들은 나를 볼 때

안경만 본다

 

나는 안 보고

안경만 본다

 

안경도 안 썼는데

안경만 본다

 

―〈어린이와 문학〉(2016년 7월호)


송진권 시인은 옥천 사람이다.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지금도 옥천에 살아서 옥천 사람이 아니라 옥천 말로 시를 쓰기에 옥천 사람이다. 옥천 말로 쓴 동시도 적지 않으니 송진권 시인은 정지용보다 더 옥천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유네스코는 2010년, ‘제주어’를 ‘사라지는 언어’ 가운데 ‘소멸 위기의 언어’ 4단계인 ‘아주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critically endangered language)로 분류했다. 1단계는 ‘취약한 언어’, 2단계는 ‘분명한 위기에 처한 언어’, 3단계는 ‘심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 4단계는 ‘아주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 5단계는 ‘소멸한 언어’다. 유네스코에 따르면 6,700여 개의 언어 가운데 2,473개가 이미 사멸되거나 소멸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사투리는 지역어, 방언, 탯말 등으로도 불리는데 국어사전에 등재되지도 않은 탯말이 가장 정확한 이름이 아닌가 한다. 탯줄처럼 어머니, 고향에 연결된 모어(母語)란 뜻이니, 사투리만의 근원적 환기력을 가리키기에 적합하다. 탯말로 된 시는 표준어로 번역이 불가능하며 번역되는 순간 형식뿐 아니라 내용(의 디테일)이 손상된다. 

 

어른이 읽어도 좋은 동시집 〈새 그리는 방법〉에서 한 편 더 소개한다. 옥천 사투리가 제대로 쓰였다. 


노이히 삼촌을 생각함 1

송진권

 

보리 빈다구 해 놓구 왜 저기는 깎다 만 머리겉이 놔둔 겨 뒀다 씨갑시 할라구 놔둔 겨 아님 덜 익어서 더 여물으라고 놔둔 겨 옷 속에 보리 꺼끄래기 든 거겉이 사람이 당최 되다 만 것이라 아심찮아 나와 봤더니 기어이 일 추는구먼그려 싸기 가서 싹 매조지하구 올 것이지 뭘 그렇게 해찰하구 섰는 겨 똥 누구 밑 덜 닦은 사람겉이

 

그게 아니구유 아줌니 저기다 종다리가 새끼를 깠다니께 그려요 종다리 새끼 털 돋아 날아가믄 그때 와서 벼두 안 늦으니께 그때까정 지달리지유

 

*아심찮다: ‘안심찮다’의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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