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설거지는 제 담당인데, 시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려요. 밥을 먹고 과일을 먹고 양치질을 하고 휴대폰을 보면서 천천히 음악 재생 목록을 고릅니다.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흥겹게 설거지를 하거든요.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흥이 깨지면 안 되니까 블루투스 이어폰을 찾아 연결합니다. 한번은 이어폰을 찾지 못해 방에서 서랍을 뒤지고 있는데, 아내가 빽 소리를 지릅니다. “설거지 안 해? 그릇 언제까지 저렇게 식탁 위에 늘어놓을 거야?” 갑자기 설거지하기 싫어집니다. 아내가 조금만 기다렸다면 자발적으로 음악을 흥얼거리면서 하고 있었을 텐데요, 이제는 시켜서 마지못해 하는 것 같잖아요.
드라마 피디(PD)의 일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대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조명이 세팅되기를 기다리고, 배우의 감정이 잡히기를 기다립니다. 함부로 재촉할 수 없어요. 진지하게 감정 잡고 있는 배우에게 “자, 바로 슛 들어갑니다!” 하면 감정이 깨집니다. 어두운 골목을 구석구석 밝히느라 선 끌고 있는 조명 팀에게 “밤새울 거야? 빨리 좀 갑시다!” 하면 사기가 팍 꺾입니다. 드라마 피디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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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교육 전문가에게 물어봤어요. 중학교에 올라가는 딸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라고 하더군요. 사춘기 자녀에겐 억지로 뭘 시키면 역효과가 난다나요? 자녀를 믿고 기다려 주라고, 묵묵히 기다리면 아이가 제 갈 길을 찾아간다고요.
잘 기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바빠야 합니다. 멍하니 남이 하는 일 보면서 기다리면 자꾸 참견하게 됩니다. 그 시간에 대본을 들여다보고, 어떻게 찍을까 고민합니다. 부모가 아이만 지켜보고 있으면 성장이 느린 것처럼 느껴져요. 아이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는 대신 내가 그냥 읽습니다. 책이 그렇게 좋다면, 내가 읽으면 되지요. 공부하라고 채근하는 대신, 그 좋은 공부, 내가 하려고요.
언젠가 <한겨레> 베이비트리 지면에서 이런 기사를 봤어요.
‘인공지능 전문가인 문석현 박사는 아이에게 돈보다는 시간의 중요성, 시간을 대하는 태도를 가르칠 것을 권했다. 문 소장은 “미래 시대에 각광받는 산업은 크게 다른 사람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서비스이거나 남는 시간에 그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서비스 두 종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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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쳤어요. 이 얼마나 좋은 말씀인가! 아이에게 시간의 소중함을 가르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아이에게 시간을 줘야 합니다. 아이의 변화를 기다려줄 수 있어야 해요. ‘어떤 일을 할 때, 나는 가장 즐거울까?’ 그것을 찾는 것이 공부입니다. 아이에게 권하고 싶은 활동이 있다면, 내가 먼저 즐겨 봐요. 독서든, 운동이든, 여행이든, 즐겁고 행복한 부모의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는 것, 세상에 재미난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이에게 보여주는 것, 그게 최고의 육아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