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을 기점으로 여학생 대학진학률(73.6%)은 남학생(73.2%)을 앞선다. 당시 대학에 입학한 여성들은 어느덧 30대가 됐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지만 30대 여성고용률이 20대 후반에 견줘 뚝 떨어지는 상황은 그대로이다. 사회혁신가를 지원하는 비영리사단법인 루트임팩트는 이러한 문제에 주목해 출산·육아·가족 돌봄 등을 이유로 일터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과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소셜벤처를 이어주는 ‘임팩트커리어 더블유(W)’ 프로그램을 올해부터 2020년까지 다섯 차례 진행한다. 올해 3월 시작한 첫 프로그램 참여자인 안지혜(30)씨는 6월부터 조직문화 연구·교육 소셜벤처인 ㈜진저티프로젝트에서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서현선(41) 공동대표를 비롯한 진저티 구성원 6명 가운데 4명은 직장을 그만둔 적이 있는 워킹맘이다. 지난 6~8월 진저티에 재취업한 안지혜·박지영(37)씨, 서현선 대표 인터뷰를 기반으로, 직장을 떠난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과 이들이 다시 일할 수 있는 일터의 조건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워킹맘이 일하기 좋은 직장은 ‘워라밸’을 가능케하는 곳이다.
“내 이름이 없어진 것 같아.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지 잃어버렸어. 누구 아내, 누구 엄마가 아닌 내 이름을 찾고 싶어.”
2016년 출산 이후 인생행로가 바뀐 안지혜(30)씨가 남편에게 한 말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 태어나, 중학생 때부터 광고 만드는 일을 꿈꿨다. 대학 졸업 뒤 국외 인턴십을 거쳐 2012년 말 광고대행사에 입사해 3년 동안 기획자로 일했다. 육아휴직에 들어간 사이 회사 사정이 어려워졌고, 돌아갈 자리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육아휴직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기간도 끝나가면서 조바심이 났다. 올해 초 지인 소개로 작은 회사에 재취업을 했지만 두 달 만에 그만두었다. ‘경력이 끊어진 나를 뽑아줄 회사가 있을까’ 싶어 들어간 곳이었다. 조직문화가 맞지 않았고, 일에 대한 만족도도 떨어졌다. 회사 역시 지혜씨를 탐탁지 않아했다. 두 차례 ‘일에서 밀려남’을 당했다는 생각에 자신감은 더욱 쪼그라들었다.
① 애 옹알이 대신 ‘잘한다’는 말
그 무렵 ‘루트임팩트 더블유’ 프로그램을 통해 진저티프로젝트 입사 지원을 한다. 직장을 그만둔 워킹맘 세 명이 2014년 설립한 진저티는 조직문화에 대한 연구를 통해 출판물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교육을 하는 기업이다.
“당연히 떨어질 줄 알았어요.” 채용확정 소식을 들은 지혜씨의 첫 마디였다. 함께 합격한 박지영(37)씨 반응도 매한가지였다. 지영씨는 지난해 5월 피자 프랜차이즈 업체를 그만둔 뒤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서현선(41) 공동대표는 두 사람을 보며, 긴 육아 이후 다시 일을 시작한 동료를 떠올렸다. “유능한 사람인데 6개월 동안 ‘난 아무것도 못하잖아요’ 란 말을 달고 살더라고요. 잘하고 있다는 자신감은 ‘관계망’에서 확인받으며 자라는 건데 육아를 하는 동안 ‘잘한다’는 말을 듣기 어려웠을 거예요. 긴 시간 위축된 심리를 갑자기 회복하는 건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됐어요.”
여러 연구를 종합해보면,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직장을 떠난 많은 여성들이 ‘아무 일도 못할 것 같은 무기력’을 겪는다. 지혜씨는 입사 전 참여한 교육에서 ‘잘한다’는 말을 2년 만에 들었다. 그동안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자신감을 서서히 회복했다. 채용 확정자들의 ‘일 감각’을 되살리고, 경력 재설계를 도와주는 과정이었다.
② 늦어도 되는 출근길
출근길 지각은 찰나의 순간에 결정된다. 당장 집 밖을 나서야 하는 순간에도, 아이는 ‘응가’를 외칠 수 있다. 똥기저귀 갈다 늦은 사연을 상사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긴 힘들다. 진저티에선 이러한 사정을 이야기하는 게 자연스럽다. 출근 시간은 오전 10시지만 강제화돼 있진 않다. 사무실 밖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 다만, 업무용 메신저 ‘슬랙’을 통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서로 끊임없이 대화한다. 다른 직장에선 공·사 구분이 미덕이지만, 진저티에선 그 반대다.
지영씨는 지각을 인사고과에 반영하지 않는 환경이, 생각보다 큰 부담을 덜어준다고 했다. 경기도 판교에 위치한 집에서 서울 마포구 합정동 사무실까진 2시간이 걸린다. 1분 1초라도 늦지 않으려면, 매일 아침마다 아이를 비롯한 수많은 변수를 제어하기 위해 분투할 수밖에 없다.
③ 야근 잦아야만 ‘프로’ 직장인?
진저티 창업자 세 명 가운데 한 명인 서현선(41) 공동대표는 2002년말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치고 비영리단체 ‘아름다운재단’에 들어가 2007년까지 눈코 뜰 새 없이 일했다. 결혼한 지 5년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서, 지속가능한 일하기를 고민하게 된다. 직장을 떠나 프리랜서로 일을 이어가면서 출산·육아기를 맞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혼자가 아닌 동료들과 소속감을 느끼며 일하고 싶단 마음이 커졌다. 다시 직장에 들어간다면? 아침 일찍 출근해 밤늦게 돌아오는 모습이 그려졌다. 꼭 그렇게 일해야만 ‘프로’인 것일까, 다른 선택지는 없는 걸까. 같은 고민을 하던 옛 직장 동료 둘과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우리가 일할 수 있는 조직을 스스로 만들어 보자’는 실험에 나선다.
항상 시간에 쫓기는 워킹맘 셋이 함께 일하기 위해선, 서로가 어떤 상태인지, 어떻게 하면 일을 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이번 주 어린이집 쉬는데, 어떻게 할까? ‘어떻게 일하고 싶어?’ ‘나는 주 4일 근무할게’, ‘나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할래’ 이런 식으로 조직이 만들어졌다.
④ 모두에게 시간 주권을
사람에 맞추어 조직을 운영하다보니 ‘유연한 구조’가 됐다. 진저티에선 누구나 주 5일·4일·3일 ‘선택’ 근무가 가능하다. 근무일수와 상관없이 모두 정직원이며, 임금만 다르게 지급된다. 다시 일하게 된 지혜, 지영씨는 주 5일 근무를 원했다.
자녀가 있는 부모들의 근무시간을 단축시키는 제도가 있다. 그러나 조직내 일부 구성원에게만 주어지는 배려는 현실에서 제 기능을 하기 어렵다. 서현선 대표의 진단은 이렇다.
“정해진 출퇴근 시간, 주 5일 근무에서 자녀가 있다는 사유로 ‘열외’가 되려면 눈치가 보이잖아요. 열외가 아닌, 선택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어요. 각자가 사정에 따라 회사와 상의해 근무일수를 줄이고 대신 돈을 적게 받으면, 그렇게 눈치 볼 일이 아니니까요.”
여성이든 남성이든 생애주기에 따라 일하는 데만 집중할 수 없는 시기가 올 수 있다. 서 대표는 반년가량 주 3일만 일한 적이 있다. 친정아버지가 돌아시면서, 아들 없는 집안 장녀인 그가 고향을 오가며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던 때였다. 이렇게 근무자가 스스로 일하는 시간을 조정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시간 주권’을 강화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루트임팩트에선 휴가를 낼 때 허락을 구하거나 사유를 쓸 필요가 없다. 업무용 메신저 ‘잔디’를 통해 휴가임을 알리기만 하면 된다. 일하다 잠시 짬을 내야 할 경우 ‘반반차 휴가’를 낸다.
진저티는 구성원들을 엄격하게 관리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널널한 일터가 아니다. 시키는 업무가 아닌 하고 싶은 일을 능동적으로 해나는 과정엔 많은 에너지와 훈련이 필요하다. 이곳에선 매달 수익·지출 내역을 모두가 함께 공유한다. 지혜씨는 “재정 상황을 보면서, 각자 ‘이번달은 괜찮은데 다음달은 좀 문제겠군. 프로젝트를 서둘러야겠어’ 같은 고민을 한다”고 설명했다. 지속가능성에 대해 묻자, 서 대표는 “생각보다 다들 일에 대한 자기주도성이 강하고 부지런해서 쉽게 망하진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⑤ 육아·퇴사·창업…그 모든 것이 경력이다
“엄마라는 경력은 왜 스펙 한 줄 되지 않는 걸까?” 광고 속 여성은 한탄한다. 일과 삶 균형을 확보하기 어려운 구조에서, 결혼·출산·육아나 가족 돌봄 등으로 경력개발에 어려움을 겪는 문제는 흔히 ‘경력단절여성(경단녀)’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된다. 그러나 ‘경단녀’라 불리는 여성들은, 이러한 호명으로 인해 삶의 일부가 평가절하되는 것 같다고 토로한다. “이직이나 연수 등을 이유로 직장 일을 중단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왜 출산·육아를 하느라 직장 밖으로 나간 여성들에게만 ‘경력단절’ 꼬리표를 붙이는가?”
송수진 고려대 글로벌경영학과 교수는 “단절이라는 말은 진행돼 가는 큰 줄기를 무언가가 가로막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출산과 육아가 경력을 방해하는 요인이라는 본다면 누구도 결혼과 일을 병행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지혜씨는 육아를 통해 ‘변화와 성장’을 경험했다. 광고기획 경력은 이어지지 못했지만, 또다른 경력이 생긴 셈이다. 이러한 관점 전환은 그가 다시 일을 해나가는 데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서현선 대표는 ‘패치워크 커리어’라는 관점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본다. 패치워크는, 각각 다른 천조각을 이리저리 조합해 하나의 커다란 천으로 만드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경험이 하나하나 쌓여 나를 구성한다는 의미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혼자 일하면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폭이 넓어졌다. 아이를 키우면서는 ‘적응력과 회복 탄력성’이 커졌다.
“애들은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잖아요. ‘언제까지 기어라, 일어나라’ 같은 목표를 설정할 수 없어요. 불확실성이 높은 시대에 계획한 대로 일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에 맞춰 변화하는 법을 육아를 통해 배웠다고 생각해요.”
직장을 중심으로 한 남성 생애주기 관점만으론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삶을 읽어낼 수 없다. 지영씨는 2007년 대학을 졸업한 뒤 10년간 ‘프로적응러’로 살아왔다. 놀이공원 롤러코스터 설치 현장에서 통역일을 시작으로 세 차례 직장을 옮기는 과정에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두 돌이 채 되지 않은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동동거리며 직장에 다니느니, 시간 주도권을 쥐어 보자며 2013년 ‘수제청 제조업체’를 창업해 이끌어 본 경험이 있다.
여성의 지속가능한 경제활동과 역량 강화를 돕는 소셜벤처 ‘위커넥트’에선 경단녀 대신 ‘경력보유여성’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단절’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거둬내고, 개인이 그동안 쌓아온 경력·역량에 초점을 맞춘 말이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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