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열두 시에 도착하여 점심 먹고 이제껏 허리 한 번 펴지 못했다.
손바닥만한 녹두전, 백 장은 되지 않을까? 고구마와 오징어를 튀기고 나니 기름 냄새가 몸에 배었다. 먹지도 않았는데 속이 느글거린다.
이제 다 됐나? 그랬으면 싶지만, 또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다. 잡채도 해야 하고, 해파리도 무쳐야 하고, 저녁밥도 지어야 하고 제사에 가져갈 떡도 쪄야 하고...... 한국 전쟁 때 물밀듯이 내려왔다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떠오른다. 아아, 아직, 일을 다 끝내려면 아직 멀~었단다.
그렇다고 내가 대단한 일을 하는 건 아니다. 시키는 대로 마늘 까고, 파 다듬고, 튀김옷 입히고, 고추장! 하면 고추장 대령하고 개수대에 그릇이 너무 쌓이지 않게 눈치껏 씻어 엎어야 하는, 부엌 서열의 말단 ‘시다’가 내 자리다. 여러 날 전부터 어떤 음식을 얼마나 할 것인지 정하고 장보고 미리 이것저것 준비해 놓으신 ‘주방장’의 노고에 견주어 겨우 하루 부엌에서 허드렛일 하는 게 뭐 그리 대수냐고 따진다면 할 말이 없다. 몸이 빠릿하지도 않고 요령도 없어 일하는 모양새가 스스로 생각해도 어설프기만 하다.
남자들? 우리가 부엌에서 지지고 볶는 동안 남자 어른 셋은 부침개 안주로 막걸리 한 잔 돌리더니 물가에 낚시를 갔다. 눈치 없이 자기들끼리 가려는 걸 ‘물고기 잡는 데 따라가고 싶지 않아?’ 하고 아이들을 선동하여 딸려 보냈다.
물고기들도 추석을 쇠러 갔는지 빈손으로 돌아와 거실에 둘러앉아 야구 중계를 보다가 저녁상을 받는다.
“녹두전이 예술이야!”
“감자탕(저녁 반찬으로 끓인)은 어떻고? 조미료 안 넣고 이렇게 맛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몇 명 안될 걸.”
그래도 눈치가 아주 없지는 않다. 곳곳에서 음식에 대한 찬사가 터져 나온다.
“할머니 밥 좀 더 주세요!”
“나는 오징어 튀김!”
손주들의 외침에 ‘주방장’은 흐뭇하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열심히 닦아내고 ‘아이구, 허리야.’를 속으로 수십 번 되뇌이면서도 어느새 부엌으로 달려가신다.
며칠 전부터 휴대폰에
‘시월드 입성!’
‘며느리들 힘내요~’
하는 ‘며느리’들의 사연과 서로 응원하고 격려하는 메시지가 쏟아지고 있지만, 댓글 하나 못 달았다.
사실, 여기는 시월드가 아니라 내가 나고 자란, 나의 부모님이 계신 친정! 시댁에서 며칠 ‘놀다가’ 추석 전날 친정에 ‘일하러’ 왔다.
며느리들의 명절 증후군에 관해서라면 별로 할 말이 없다. 결혼한 지 십삼 년, 꽉 막힌 도로에서 ‘민족의 대이동’을 뼈저리게 겪거나 ‘일해주러, 음식 하러 결혼했나?’ 하는 부당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연휴가 짧아 길이 혼잡스러울 것 같으면 먼저 ‘이번에는 내려오지 말거라.’ 하시거나 시부모님이 ‘역귀성’ 하셔서 함께 명절을 보내기도 한다. 연휴에 휴가를 붙여 여행을 갈 때도 ‘일이 바빠 휴가를 제대로 못 쓰니 이럴 때라도 잘 놀다 오라’며 기꺼이 보내주셨다.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에는 할머니 의견을 따르는 의미에서 간소하게나마 명절 음식도 하고 새벽에 큰댁에 모여 차례를 지내곤 했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님께서 집안에서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위치에 오르자 개혁(!)을 단행하셨다. 제사의 횟수와 절차를 줄이고 명절에 큰댁에 모이는 공식적인 행사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에 일 년에 한두 번, 다른 날을 정해 친척들이 모여 1박 2일 야유회를 간다. 명절이라고 온 나라가 들썩일 때를 피하니 모이기 좋고 고모님들도 함께 모일 수 있고 명절이라는 틀에서 벗어나니 음식 준비도 훨씬 자유롭다.
이번 추석에도 가벼운 마음으로 시댁에 갔다. 일요일이 아버님 생신이라서 월요일과 화요일 휴가를 내고 현장 학습 신청을 하니 무려 9일간의 긴 연휴가 되었다.
함양 수동~안의를 잇는 ‘선비 문화 탐방로’. 덕유산 자락의 화림동 계곡을 따라 옛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며 놀았다는 정자들이 있다.
느긋한 기분으로 한가로이 거닐며 햇살 뜨겁지만 바람 선선한 초가을의 정취를 즐기고
산기슭에 자리 잡은 아버님 농사 일터에도 가 보았다.
여름 방학에 여러 번 와 본 아이들은 할아버지 따라 신발 벗어 제 끼고 마른풀 수레에 나르고 땅콩 캐는 일을 거든다.
백일홍, 박하, 맨드라미, 아기 범부채, 해바라기 등 어머님 꽃밭에는 벌 나비 날아들고~
그날 저녁 아루의 일기는 땅콩 캐는 재미에 대한 내용이다.
해람이는 해바라기를 그렸다.
아줌마는 거창 스타일~
강동구 촌구석에 살다가 거창 읍내에 나왔으니 영화도 보고 (상영관이 무려 2개!) 일 년 만에 미용실에서 머리도 했다.
함양에 귀촌한 친구네 까페에 죽치고 앉아 만화책을 독파하고 까페 문 닫고 치맥을 시켜 늦게까지 수다를 떨었다. (좌린이 그린 함양 '빈둥까페")
이렇게 ‘팔자 좋은 며느리’ 노릇을 실컷 즐기다가 친정 갈 날이 다가오니 문득 우리 집에 ‘시집온’, 또 다른 며느리인 새언니 생각이 났다. 친정 집도 차례를 직접 지내지는 않지만, 종가인 큰댁의 차례 음식을 도와야 하고 어느덧 자식 셋이 모두 결혼하여 아이를 둘씩 두었으니 모두 모여 하루, 이틀 먹고 마실 음식을 장만하려면 일이 꽤 많다.
원래 체력이 약하신데 자식, 손주 먹이는 일에는 내 몸 생각지 않고 열심히 정성을 다하는 엄마 생각도 났다.
시댁에서는 시부모님 덕분에 ‘팔자 좋은 며느리’인 나,
친정에서는
“요즘 세상에 누가 이렇게 다 손수 만들어요? 음식 장만하느라 무리하지 말고 그냥 적당히 되는대로 먹으면 안돼? 식구 많은데 밖에서 사 먹기도 하고”
차린 상, 받아먹기만 하는 것이 미안해서 말은 이렇게 하지만,
명절 당일 나타나 실컷 먹고 놀다가 길 막히기 전에 서둘러 빠져나가는 ‘도움 안 되는’ (나아가 얄미운! 일지도 모른다.) 시누이, ‘그래도 역시, 엄마가 만든 음식이 제일’이라고, 속마음 팍팍 드러내는 철없는 막내딸, 실상은 그렇다.
좋았어, 이번 기회에 괜찮은 시누이, 철든 막내딸이 되어보는 거야! 시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추석 하루 전날 친정에 왔다.
오자마자 점심을 먹고 설거지부터 도왔다. 새언니는 엄마와 몇 년 동안 호흡을 맞춰온 터라 일을 척척 알아서 하는데 나는 ‘마음은 이효리지만 몸은 이미자’라고, 의욕은 넘치는데 뭐가 어디에 있는지, 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허둥지둥, 우왕좌왕했다. 그래도 꿋꿋이 밤늦게까지, 추석 상에 올릴 송편을 쪄서 담고, 그릇들 정리하는 마지막까지 엄마 곁에서 작은 심부름을 했다. 처음에는 ‘하이고, 네가 뭘 하겠냐’던 (때론 억울한데 엄마는 내가 막내라고 나를 어리게만 보는 경향이 있다.) 엄마도 나중에는 무척 기뻐하셨다.
수십 년 집적된 엄마표 요리의 노하우를 어깨너머로 배울 수 있게 된 것도 큰 소득이고 새언니랑 느글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느라 콜라를 나눠 마시면서 한결 가까워진 것 같다.
엄마가 만든 송편.
재작년 여름, 처음 열무김치를 담그며 나는 몹시 들떴다. 나도 이제는 어엿한 살림꾼이라고, 주부 9단이라도 된 양 으쓱했다. 그런데 요즘 요리와 살림이, 하면 할수록 점점 어렵게 느껴진다. 올여름에도 열무김치, 오이소박이를 여러 번 담갔는데 할 때마다 짜거나, 싱겁거나 뭔가 석연치 않았다. 그러다 엄마가 담근 작년 김장 김치를 먹으면 그 깊은 맛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엄마의 솜씨와 정성을 본받고 싶다.
어느덧 엄마도 칠순을 넘겼다. 이렇게 맛난 음식을 먹는 것은 참 행복하지만, 우리가 다녀가고 나면 며칠은 꼼짝 않고 쉬셔야 할 것이다. 자손들 잘 먹이고 싶은 마음도 좋지만 안 그래도 몸 약한 분이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다음 명절부터는 오빠네, 언니네, 우리, 세 집이 한 끼씩 맡아서 요리를 준비해보는 것은 어떨까, 엄마가 쉽사리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조금씩 이런 시도를 해보면 좋을 것 같다.
엄마, 엄마, 추석에 보름달 보면서 엄마는 무슨 소원 빌 거야?
추석날 아침, 아루가 묻는다.
글쎄, 어떤 소원을 빌까?
생각하다가 문득 아버님 논의 벼가 떠올랐다. 봄에 모내기하여 한여름 햇빛, 비와 바람, 구름이 키워낸 누렇게 익은 벼. 우리가 먹을 쌀, 우리 식구 일 년간 키워낼 귀한 쌀이다.
지금이야 추석의 의미가 빛이 많이 바랬지만, 원래 농사짓던 시대에는 곡식과 열매를 거두며 땅을 비롯한 자연, 조상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추수 감사’의 날이었겠지.
이렇게 풍족한 먹을거리 키워주신 땅님, 하늘님, 바람님, 구름님, 비님, 햇님, 달님~
고맙습니다!
오늘 저녁엔 달 보며 꾸벅 절이라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