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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도 사랑도 걸게 하는 새끼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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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jpg»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새끼손가락
김륭

걔가 약속, 하고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나도 약속, 하고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마침내 찾았다
서로의 말을 걸어둘
곳! 

어릴 땐 코만 파던 새끼손가락에
약속을 걸고 사랑을 걸었다 

―〈첫사랑은 선생님도 일 학년〉(창비 2018)

손가락은 하는 일이 참 많다. 그중에서도 엄지손가락부터 꼽아 가며 하나 둘 셋 넷, 세어 보는 일. 어렸을 땐 따거나 잃고 남은 딱지와 구슬을 세고, 다가올 소풍과 운동회 날짜를 셌다. 요 며칠은 강한 바람에도 떨어지지 않고 장하게 살아남은 모과와 감을 세어 보게 된다. 고마움의 눈 맞춤일 거다.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 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김준태 시인의 ‘감꽃’은 오래전 스치듯 보았는데도 잘 잊히지 않는다. 이 시는 늘 내게 묻는다. 지금, 내가 세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손가락은 저마다 하는 일이 다르다. 엄지 자리는 엄마 자리 같다. 다른 손가락과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네 손가락/ 손톱도 문질러 주고/ 손가락 사이사이 살펴 주고// 연필 잡을 때/ 리코더 불 때/ 옆에서 아래에서/ 조용히 받쳐”(방주현, ‘엄지 자리’) 준다. 네 손가락과 마주보며 하나하나 어루만질 수 있는 유일한 손가락이 엄지다. 침 발라 돈을 세는 궂은일도 엄지 몫이지만, 짧고 굵은 몸을 세워 ‘척!’ 가장 강한 칭찬을 날릴 수 있는 것도 엄지밖에 없다.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 약손가락, 새끼손가락이 엄지를 만나는 모습은 귀인을 알현하는 사람을 연상시킨다. 굽실거림하고는 격이 다른 겸손한 품위 같달까.  

김륭 시인의 ‘새끼손가락’은 사랑스럽다. “어릴 땐 코만 파던 새끼손가락”을 “서로의 말을 걸어둘/ 곳!”으로 새롭게 발견한 시적 주체의 성장을 축하하게 된다. 엄마 아빠랑도 이제까지 수없이 “약속을 걸고 사랑을 걸었”겠지만 지금 그 애와 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거기엔 지금과 같은 떨림의 감전이 없었다. ‘거는’ 것은 ‘하는’ 것과 다르다. 말을 하는 것과 말을 거는 것, 약속을 하는 것과 약속을 거는 것, 사랑을 하는 것과 사랑을 거는 것. 걸자면 그 애와 나 사이에 굳고 깊게 박힌 못(!)이 있어야 한다. 떨어지지 않도록 매달아 올려놓는 것이 거는 것이다. 우리를 ‘하다’에서 ‘걸다’로 넘어갈 수 있게 한 새끼손가락이 고맙다. 

손가락이 하는 일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자. 엄지부터 차례차례 이름을 불러 보자. 집게손가락-가운뎃손가락-약손가락-새끼손가락. 왜 그 이름이 붙었을까 생각해 보자. 목 뒤에 콕, 손가락 점을 찍은 다음 어떤 손가락인지 맞혀 보자. 엄지의 도움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고 손가락 하트, 손가락 전화처럼 엄지와 서로 도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종이에 엄마 손을 올려놓고 따라 그린 다음, 그 안에 아이 손을 놓고 따라 그려 보자. 엄마 손 옆에 아이 손, 아이 손 옆에 아빠 손을 그려 보자. 세수할 때처럼 두 손을 오목하게 모아 한동안 옹달샘처럼, 거울처럼 그 안을 들여다보자. 그런 다음 천천히 두 손을 얼굴로 가져가 물 없는 세수를 하듯 이마부터 턱까지 쓸어내리기. 손가락 끝으로 이마, 눈썹, 눈, 코, 광대뼈를 느껴 보자. 입을 지날 때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려 주고 엄지가 턱 밑에 놓이는 자리에서 마무리하기. 틈날 때마다 눈을 감고 손가락 거울을 비추어 보자. 

하트를 만들어 수많은 사랑의 표정을 날리기도 하지만 몹쓸 짓도 많이 하는 게 엄지와 집게손가락(검지)이다. 잠자리를 시집보낸다고 꼬리를 잘라낸 자리에 풀대궁을 끼워 날려 보낸 것(류선열, ‘잠자리 시집보내기’)도, “개구리 몇 마리 잡아 똥구멍에” 푸푸― “바람을 넣어” 장사지내기(류선열, ‘개구리 장사지내기’) 놀이를 한 것도 그 둘의 소행이다. 다시는 내려앉을 수 없게 “다리를 뜯고” 잠자리를 날려 보낸 것(김개미, ‘가을 하늘’)도.
개미
유강희  

대나무 자 눈금처럼
작고 까만 개미를

엄지와 검지로
눌러 죽인 다음

입으로 후―
불어 날린 적 있다

너무 작아서
아픈 것도 죽는 것도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하며,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줄 알았다  

―〈어린이와 문학〉(2017년 6월호)


왜 그랬을까. “너무 작아서/ 아픈 것도 죽는 것도/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하며,” 자기합리화를 했겠지만, 아주 오래전 일임에도 잊히지 않는 사건으로, 지나가거나 사라지지 않은 사건으로 현재화되는 것은 왜일까. 지나가거나 사라진 줄 알았던 기억을 불러 내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줄 알았다”는 반성을 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그전엔 미처 몰랐던 것을 알고 불현 듯 소스라칠 때가 있다. 아이가 새가슴으로 태어나고서야 어렸을 적 철없이 잡아먹은 참새를 떠올린다. “새끼 참새를/ 붙잡”았을 때, “지붕에서/ 울음소리 참으며/ 그걸 보고 있었”을 “참새의/ 어머니”(가네코 미스즈, ‘참새의 어머니’)를 그땐 왜 보지 못했던 걸까.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나
이안  

그러다 마음까지 굳어질라!  

주먹 쥐고 자는 날 많은 아버지 보고
할아버지는 아버지 손가락
하나하나 펴 주었대요  

손바닥 보이고 자는 날 많은 나를 보고
아버지는 내 손가락
하나하나 접어 주었대요  

그러다 마음까지 물러질라!  

―〈고양이의 탄생〉(문학동네 2012) 


잠에서 깨면 주먹이 꼭 쥐어져 있다. 어릴 때부터 버릇이다. 쉰이 넘은 지금까지도 고치지 못했으니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난 모양이다. 세 살 버릇 기어코 여든까지 갈 모양이다. 깨어나 손을 펴면 얼마나 꼭 쥐고 잤는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또렷하다. 자기 전에 잘 펴서 천장이 보이게 놓았는데도 깨어 보면 어김이 없다. 잠결에 아버지는 내 손가락을 하나씩 펴 주며 걱정하셨다. “그러다 마음까지 굳어질라!” 그런데 이상했다. 아이를 낳고 보니 정반대였다. 언제나 손가락을 펴고 잤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아이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주며 괜한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음까지 물러질라!”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인 것이 부모 마음이라지만, 괜한 걱정은 아니었다. 나는 아직까지 작은 일에도 꼭꼭 주먹을 쥐고, 아이는 여간 큰일에도 좀처럼 주먹을 쥐지 않으니 말이다.

김륭 시인은 200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와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동시와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 〈원숭이의 원숭이〉와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삐뽀삐뽀 눈물이 달려온다〉 〈별에 다녀오겠습니다〉 〈엄마의 법칙〉 〈달에서 온 아이 엄동수〉를 냈고, 얼마 전 여섯 번째 동시집 〈첫사랑은 선생님도 일 학년〉을 냈다. 동시의 시대 10년 동안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친 시인 가운데 한 명이며, 남들과 확연히 다른 동시 문체를 구사해 왔다. 활달한 상상력, 대담한 비유와 리듬, 속도감 있는 이미지의 운동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동시를 빼고 2010년대 동시를 이야기할 순 없다. 〈첫사랑은 선생님도 일 학년〉에서 한 편 더 소개한다. 지금, 김륭 시인의 열 손가락은 타닥타닥, 모닥불 같은 시를 피워 올리고 있을 것이다. 
있음 없음
김륭  

우주복 있음 거북이는
느릿느릿 기어 다니지만 우주복
있음 토끼는 없음
거북이를 앞질러 뛰어가지 않고
날아가더라도 우주복 없음
수영복도 없음  

너는 없음 수영복은 있지만
우주복 없음 나는 있음
수영복은 없지만 우주복 있음
그래서 공부를 못함

너는 우주복만 없음 가진 게
너무 많아 무겁고 나는
우주복만 있음 우주복 말고는
가진 게 너무 없어 가볍고
날아갈 수 있음 너는
날아갈 수 없음

너는 다 있음 우주복 말고는
나는 다 없음 우주복 말고는  

그래서 나는 너를 데리고
날아갈 수 있음 멀리
우주 끝까지


이안 시인, <동시마중> 편집위원 anin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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