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3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아는 사이였으니 그와 나의 역사를 따져보면 20년, 그러나 졸업할 때까지는 길에서 만나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는 ‘아는 여자’, ‘아는 남자’에 불과했으니 여기까지 거슬러갈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쓸 글을 생각해 보아도 이렇게 긴 역사를 떠벌리는 게 큰 의미는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우리는 뉴밀레니엄이 도래한 시기에 ‘결혼’했고 13년 동안 같이 살았다.
친한 후배는 우리의 결혼식이 애들 공연 같았다고 말했다. 늘 꾀죄죄하던 둘이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고 얼굴을 허옇게 바르고 나타났으니 달라 보였겠지. 우리 사진으로 슬라이드쇼를 만들었고 남편이 하모니카를 불었다. 그리고 ‘신랑 OOO는, 신부 OOO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서로를 사랑하겠습니까?’라는 엄숙한 물음에 수줍게 대답하는 게 바보 같다고 생각했기에 주례를 두지 않고 둘이 만든 ‘결혼 선언’을 함께 읽었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내가 힘들 때 나보다 더 힘든 상대방을 헤아리겠습니다.’와 ‘다투더라도 한이불 덮고 자겠습니다.’이다.
13년 동안 우리는 꽤 잘 지냈던 것 같다. 신혼집에 친구들을 불러 함께 놀았고 동갑이다 보니 상대방의 친구라는 경계를 허물며 잘 지냈다. 일하고 남는 시간은 거의, 심지어 그의 회식, 워크샵도 따라다니며 최대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사진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어 말도 잘 통했다. 여지껏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크게 충돌한 적도 없고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방향도 얼추 비슷하다고 느꼈다. 물론 사소하게 다투고 상처준 적도 있지만 완벽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런데 어느 날, 불과 열흘 전의 일이다. 아이들 재우고 옥상에서 둘이 술을 먹는데 남편이 내게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뒤통수를 둔기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찔했다. 예상 밖의 일격, 요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잘 지내고 있었다. 그는 돈 버느라 바쁘고 나는 집에서 어린 애들 돌보느라 힘들었던 지난 몇 년, 그 긴 터널을 거의 빠져나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각자 조금씩 벌고 각자의 길을 모색하며 집안일, 아이들 보살피는 것을 같이하는 지금의 생활이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나는.
어떤 년이야? 충격 속에 가장 먼저 튀어나온 생각은 이것이었다. 그 짧은 순간 머릿속에는 드라마 ‘사랑과 전쟁’ 한 편이 만들어지려 했다.
“누가 생겼구나.”
“아니.”
일단은 안심. 그러고 나서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누고는 내려와 잠자리에 들었다. 어떤 상황이 너무 충격적이면 스스로 알아서 방어를 한다고 하지 않던가. 당시에는 꽤 담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새벽에 잠이 깼다. 그리고 그가 했던 말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사랑하지 않아, 사랑하지 않아, 이 말이 마음속에 파문을 만들기 시작하여 마침내 큰 소용돌이가 되었다. 나는 상처 받았고 눈물이 쏟아졌다. 모멸감, 그리고 배신감에 휩싸였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수많은 드라마 대사와 노래 가사가 내 감정을 변호하고 지지했다. 냉정히 따져보려고도 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도 아니면서, 왜, 지금 이렇게 잘 지내는 와중에 이런 말을 하는 건지.
돌이켜보면 십 여년 전에도 ‘사랑’은 아니었던 것 같아.
그럼 왜 결혼하자고 그랬냐고!! 그래서 판 깨자는 거야?
지금처럼 그냥 살면 되지. 사랑에 얽매이지 말고 물 흐르듯 같이 잘 살아보자.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같이 사니? 뭐 때문에?
그동안 아이들과 예쁘게 잘 살았잖아. 그걸 놓아버리면 안 되지.
그러니까 사랑하지 않는데 애들 때문에 그냥 같이 살자는 거야?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하지 않지만, 함께 잘 살아보자.’는 건 대체 뭔데. 사랑하기에 떠나신다는~이란 노래는 들어봤어도 이런 건 노래 가사에도 없다. 애들 때문에 못 헤어지고 어쩔 수 없이 구질구질하게 살아보자는 건가.
일주일 동안 숱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똑같은 멜로디가 조금씩 다르게 변주될 뿐. 나는 계속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에 절망하고 뭐가 문제인지 따졌고 그는 사랑이라는 말에 모든 걸 다 걸고 그게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그 ‘사랑’이 싫다고 말했다. 변한 게 없다는 그의 말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그는 내가 이런 말로 왜 상처받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남자고 나는 여자다. 여자들은 보통 이럴 때 마음 터놓을 수 있는 친구를 찾는다. 나는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우리가 처음 만날 때부터 지켜본 지인들에게 울며 전화를 했다. 그녀들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을 보듬어 주고 용기를 주었다. “왜, 딴 여자가 생겼대?” 처음에 그녀들은 내가 처음 들었던 생각과 똑같이 반응했고 내가 느끼는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내어도 척척 알아들었다. 같이 분노하고 같이 아파해주고. 공감, 마음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정말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들도 ‘남자’가 아닌지라(남자라고 다 똑같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남자들은 보통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니 자기 말고 다른 ‘남자’가 어찌 생각하는지는 모를 수도 있겠다.) 같이 머리를 맞대어 생각해봐도 이 남자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뒤늦게 사춘기가 온 게 아닐까? 무언가 일단 부정하고 반항하고 보는. 남자 중에 전두엽이 늦게 발달하는 사람도 있대.” 이런 추측을 해보고 헤어지자는 건 아니니까 힘들지만 좀 지켜봐 주라고 격려해주었다. 무엇보다 “네 탓이 아니야. 그러니까 네 마음 잘 다독여!”라는 말이 참 따스했다.
충격적인 고백 이후 다툼, 괜찮은 척, 다툼을 반복하다가 일주일째 되던 날, 밤새워 다퉜다. 이기적이고 어른답지 못한 생각이지만 내 감정에 그냥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치밀어오는 감정과 떠오르는 생각을 억누르거나 숨기지 말고 터뜨리면 좀 가벼워지지 않을까. 그러나 당사자인 남편에게는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 (너무 격해져서 그때는 그런 생각을 못했는데, ‘공감’하지 못하는 남편에게 내 감정은 자신에 대한 ‘비난’이 될 뿐이다.)
감정을 토해내고 미칠 듯 괴로워하며 또 하루를 보내고 기진맥진하여 책상 앞에 엎드려 그래 관두자, 라고 결론을 내렸는데 불현듯 낮에 고민 상담해주던 지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말에 너무 얽매이지 마.”
부스스 일어나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었다. 한동안 아침 명상을 한다며 조금씩 읽던 책, 정하지 않고 아무 페이지나 열어 닥치는 대로 읽었다. 우연히 펼친 곳, 어느 한 구절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이제 완전히 방향을 바꾸어보자. 오직 한 방향으로만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어보자. 자신의 생각과 투사하는 것을 좇는 데 삶을 소모하도록 우리는 교육받았다. 심지어 <마음>이 이야기되더라도, 언급되는 것은 생각과 감정뿐이다. 어떤 연구자가 마음이라고 상상하는 것을 연구할 때, 그는 자신이 투사한 것만을 볼 뿐이다. 어느 누구도 모든 언어적 표현의 근원인 마음 자체를 실제로 바라보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비극적인 결말을 피할 수 없다.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티베트의 지혜, 소걀 린포체 지음.)
그동안 나를 아프고 힘들게 한 것은
사랑하지 않아, 사랑이 아니었어, 그가 했던 ‘말’에 대한 나의 집착
그리고 ‘내가 뭘 잘못했나?’ 혹시 그럴지 모른다는 괴로움, 그렇지 않다는 억울함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말’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려는 생각에 거리를 두었더니 분노의 감정이 조금씩 사그라졌다. 그리고 나와 그의 성장 과정과 함께 살아온 날들이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그는 늘 ‘사랑’이라고 말하기 힘들어했다.
“이제까지 좋아한 여자가 열 명정도 되는데 네가 그중에 하나야. 그런데 너랑은 같이 살고 싶어.” 13년 전, 애초에 그의 프로포즈는 이랬다. 그는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적이 없었고 나 역시 영화와 같은 ‘낭만적인 프로포즈’가 상투적이고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내 발등을 찍은 것이다!) 물론 나는 그가 나를, 그리고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같이 살면서 나는 사랑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남편에게 종종 서운했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그가 심술궂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는 화성인이고 나는 금성인이기 때문에 생기는 여러 갈등, 대표적으로 그는 내 기분과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별로 친하지 않은 이웃집 여자와도 쉽게 공감하는 것을! 심리학 책을 읽으며 서로의 ‘차이’에 대해 비교적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가 그 차이를 극복해주길 끊임없이 바랐던 것 같다. 그런 척이라도 좀 해주던지! 결혼해서 같이 산다면, 사랑한다면 그래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고 생각을 바꾸면 되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불만스러웠다.
그런데 문득 내가 생각하는 그 ‘작은 노력’이 그에게는 그리 간단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의 사고체계로는 정말 도저히 알 수 없어 어찌할 바를 몰랐던 건 아닌지. 그리고 그가 ‘사랑’이라는 말을 부정하거나 머뭇거리는 태도를 갖게 된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나 이외의 다른 관계 속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내가 고집하던 ‘사랑’의 틀에서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 것, 그리고 그가 하고 싶은 것을 떠올려보았다. 나는 그와 함께 아이들과 함께 재미난 일을 찾아 지금처럼 사는 것이 좋다. 그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아끼고 좋은 마음으로 성실하게 나를 대해주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보자고 한다.
13년 같이 산 부부, 란 뭘까?
정말 더이상 ‘사랑’은 아닌가?
그저 친근하고 편안하게 지속되는 우정인가?
부러 생각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하는 습관인가?
나는 이런 질문들 속에서 참 혼란스러웠는데 이제 굳이 답을 찾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사람은 모든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된단다.
모든 것에 대답하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어떻게 되는데?”
“잃어버린단다.
자기 자신을.”
(마스다 미리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말장난 같기도 하지만 사랑이니, 우정이니, 습관이니, 하나를 정하는 것이 오히려 관계의 핵심을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함께 산 지 13년,
‘내가 힘들 때 나보다 더 힘든 상대방을 헤아리겠습니다.’, ‘다투더라도 한이불 덮고 자겠습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우리가 읽은 결혼 선언을 우리는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 같다.
내 감정을 온전히 이해해주고 내 기분에 다가오기를 바라는 나의 욕심,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렀던 건 아닌지, 당연히 그가 해야 할 노력, 크지 않은 기대라고 생각한 것이 그를 너무 힘들게 하지 않았나, 돌아본다.
물론 책에서 마음에 와 닿는 글귀를 발견해냈다고 한순간에 내 감정과 생각이 다 정리된 것은 아니다. 내가 대단한 명상가나 보살도 아닌데!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선언을 했어야 했는가? 의문은 남는다. 그가 왜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내 생각엔) 그냥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 꼭 아니라 말해야 하는지,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인지, 과연 있기나 한 건지. 그러나 그 대답은 그가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지, 내가 요구하거나 어찌해줄 수 없는 게 아닐까?
의심과 두려움도 있다. ‘사랑’이라는 구속력 없이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한마디에 이렇게 훅~가는 나는 보봐르처럼 구속하지 않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쿨한 인간도 아니다. 그런 척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약속이란 게 무슨 의미일까? 철저히 약속하고 미리 걱정한다고 해결이 될까? 지금 우리에겐 그의 말대로 목적지를 정하지 말고 물 흐르듯이 그냥 가 보는 게 최선일 지도 모른다. 그렇게 흘러가다가 뭔가를 발견하거나 알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 그렇게 가보자. 우리가 탄 배가 사랑호인지 우정호인지 습관호인지 모르겠지만.
아니면 이미 각자의 배를 타고 가고 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