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정은 아이들이 정했다. 일방적으로 내가 정해서 끌고 다니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면 좋을 것 같았다.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찾아 해보면 여행이 더 즐거워지지 않을까.
어디로 갈까? 게스트하우스에 비치된 브로셔와 여행 안내서를 펼쳐놓고 자못 심각하게 고민했다. 새 공원과 쌍둥이 빌딩, 아이들의 관심이 두 군데로 모아졌다. 해람이는 새 공원 브로셔의 혼빌 사진에 홀딱 반했다. 입 모양이 바나나같이 생겼다고, ‘바나나 입 새’를 보러 가자고 했다. 아루는 쌍둥이 빌딩을 골랐다. 말레이시아 게임을 하면서 어트랙션(Attraction) 카드에서 익히 보았던 쌍둥이 빌딩, 쿠알라룸푸르의 랜드마크(Landmark)답게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도착한 첫날부터 도심 곳곳에서 두 개의 탑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들이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두 곳에 대한 소개를 읽어 주었다. ‘쌍둥이 빌딩 인근 공원에는 수중 분수대, 놀이터와 어린이 전용 수영장이 있다.’ 수영장이 있다는 말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야호! 두말할 것 없이 오늘의 일정은 쌍둥이 빌딩, 아니, 그 앞의 수영장으로 정해졌다. 가방을 뒤져 수영복을 꺼내 들고 날아갈듯 춤을 추었다.
# KLCC 가는 법
KLCC(Kuala Lumpur City Center)는 쌍둥이 빌딩이 자리하고 있는 쿠알라룸푸르 도심 한복판을 이르는 말이다. 12만평 부지에 쌍둥이 빌딩과 호텔, 컨벤션 센터, 쇼핑몰, 그리고 열대공원이 있다.
쌍둥이 빌딩 바로 앞에 펼쳐진 KLCC 공원, 그곳의 어린이 수영장을 찾아가기로 했다.
물론 택시를 타면 간단하다. 목적지를 말하면 알아서 데려다 주니까.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에겐 되도록 택시를 타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생겼다. 가장 그럴듯한 이유는 현지인의 삶을 조금이라도 생생하게 느끼고 싶어서다. 겨우 며칠 지내면서, 이 도시를 얼마나 알게 될까, 여기 사는 사람들을 얼마나 이해하게 될까, 생각하면 아쉬움이 많다. 속속들이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그럴 수도 없지만, 꾸미지 않은 민낯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은 게 여행자의 욕심이 아닐까. 유명한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것보다 대중교통을 타고 현지인들과 어깨를 부딪쳐보는 경험이 더 소중할지도 모른다. 외국인 여행자가 우리나라를 여행하며 서울을 알고자 한다면 남산의 한옥마을을 둘러보는 것보다 출퇴근 붐비는 지하철을 타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건 좀 끔찍한 경험인가??)
지도를 펼쳐놓고 동선을 그려보고 계획 짜는 것을 즐기기에 지하철이나 버스 노선을 연구하는 것 그 자체로도 재미를 느낀다. 노선을 연구하다 보면 생소하던 지명에 익숙해지고 지도 보기가 한층 수월해지는 이점도 있다.
여행 다니면서 멋모르고 택시를 탔다가 기사가 무리한 요금을 요구하거나, 내가 의도하지 않은 엉뚱한 곳에 내려주는 일을 여러 번 겪다 보니, 택시를 믿지 못하게 된 탓도 있다.
흠흠, 어쨌든 우리는 조금 여유가 있으니까,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빨리빨리, 눈도장 찍고 쓱 훑어보는 여행을 지양하니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중교통을 타고 이 도시를 천천히 음미해보자.
게스트하우스에서 아침 먹을 때 다른 여행자에게서 공짜 시티투어(City tour) 버스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관광객을 위해 만든 버스인데 현지인들이 더 많이 이용한단다. 아싸, 공짜 버스!! 따져보면 큰돈을 절약하는 것도 아닌데 공짜 버스라는 말에 기분이 좋다. 몰라서 못 탔다가 나중에 알게 되면 배가 아플 것이다.
시티투어 버스, Go KL 버스는 퍼플라인(purple line), 그린라인(green line) 두 개의 경로로 쿠알라룸푸르 도심을 운행한다. 버스 경로가 표시된 지도에서 우리가 가려는 KLCC 정류장을 확인하고(KLCC는 그린라인이다.) 게스트하우스 스태프가 지도에 표시해준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Go KL 버스가 여러 대 지나갔는데 모두 퍼플라인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다음 퍼플라인 버스가 왔을 때 그린라인 버스는 언제오냐고 물었더니 버스 루트가 바뀌었다며 일단 타라고 했다. 그린라인 버스로 갈아탈 수 있는 곳에서 내려주었다. 마침내 기다리던 그린라인 버스를 탔는데 버스가 KLCC 주변을 빙빙 도는지 쌍둥이 빌딩이 잡힐 듯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것을 삼십 분쯤 되풀이했다. “엄마, 저기, 저기!!” 아이들이 가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고 불평할 줄 알았는데 숨바꼭질하듯이 눈앞에서 사라진 쌍둥이 빌딩을 다시 발견해내며 좋아라했다. 공짜버스는 아주 신형이었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도 있고 에어컨도 빵빵한데다 무료 와이파이까지!
숙소에서 KLCC 까지 고작 2.5km인데 이렇게 버스 정류장 찾아 헤매고 버스 안에서 쌍둥이 빌딩이랑 숨바꼭질하느라 1시간이 훨씬 더 걸렸다. 휴우, 걸어도 될 거리를 돌고 돌아 이렇게 왔다. 대중교통에 대한 찬사를 길게 늘어놓게 된 솔직한 이유이다.
#페트로나스 쌍둥이 빌딩
드디어 쌍둥이 빌딩 앞에 섰다.
개발 도시의 상징인 이런 초고층 건물에 감탄하지 말아야지. 생각은 그런데 올려다보니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온다. 우와~ 멋지다!
밖에서 목이 뻐근하도록 위를 올려다보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쌍둥이 빌딩을 둘러싸고 있는 6층 건물은 호화로운 쇼핑몰이었다. 공짜 버스 타본다고 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 되어 먼저 밥을 먹기로 했다. 푸드코트에서 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뭘 먹을까, 의논하는 데 두둥~수영복을 놓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벌 옷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수영복과 여벌 옷을 넣은 주머니를 통째로 두고 와서 방법이 없었다. 우리가 점심을 먹는 사이 좌린이 다녀오기로 했다. 푸드코트 위층에 페트로사인스라는 어린이 과학관이 있어서 거기서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 싶었는데 토요일이라 대기 시간이 길어서 못 들어갔다.
덕분에 푸드코트에서 느긋하게 점심을 즐겼다. 쇼핑몰의 푸드코트란 서울에서의 풍경과 별다르지 않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라 편안하게 느껴졌다. 쿠알라룸푸르라는 것도 잊고 여행 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서울에서 하듯 회전 초밥을 시키고 볶음밥을 시켜 배불리 먹었다.
#휘파람 소녀와 차도르 소년 한 번 놀아볼까?
좌린이 수영복을 가져올 때까지 놀이터에서 놀았다. 색다른 놀이기구가 있는 것은 아니고 미끄럼틀, 그네, 어느 놀이터에나 있는 것들이지만, 놀이터가 어마어마하게 커서 한 번씩 다 타보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아루는 약간 긴장되지만 스스로 즐길 여지가 생길 때 휘파람을 분다. 휘파람을 부는 걸 보니, 그리고 어제까지 긴장감이 감돌았던 해람이 얼굴에 웃음이 피어나니 보기 좋았다. 배시시, 웃음이 났다. 아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밝아졌다.
좌린이 수영복 가지고 나타나기 바쁘게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수영장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물이 얕았다. 겨우 발목, 깊어 봤자 내 무릎도 되지 않는! 그래도 아이들은 아~아~주 신나게 놀았다. 우리는 다른 부모들처럼 주변에 모여앉아 아이들 노는 것을 지켜보며 인터넷을 했다. 근처의 트레이더스 호텔의 와이파이가 잡혀서 속도는 느리지만 공짜로!
지칠 때까지 놀고 숙소로 돌아가는 가면서 공원을 한 바퀴 돌아봤다.
토요일 오후 공원에서 아이들과 한가롭게 물놀이하고 산책을 즐기다 보니, 왠지 여행하는 게 아니라 그냥 주말 나들이를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족, 연인, 친구들끼리 공원에 온 현지인들에 섞여서 바로 그들처럼.
#살아봐도 좋겠다.
남미의 어느 마을이었나, 조그만 마을에 성능 좋은 스피커로 음악을 틀어주는, 여행자들 사이에 소문난 펍(pub)이 있었다. 이 마을에 오려면 구불구불 산을 깎아 만든 좁은 산길로 해발 수천 미터의 산을 넘어야 했다. 사람들은 이 길을 ‘죽음의 길’이라고 불렀다. 스무 시간 버스를 타고 가는데 창 밖의 아찔한 풍경에 눈을 뜰 수 없었다. 바퀴가 조금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깊은 절벽으로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산이 험해서 시체도 찾을 수 없다는 그 위험한 길을 통과해서 마을에 도착한 여행자들 사이에는 일종의 동지 의식이 싹텄다. 저녁마다 이 술집에 모여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다들 여행 좀 해 봤다는 얼굴로 자신의 모험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한 번은 돌아가면서 자신에게 최고의 여행지를 말하게 되었는데 누군가, 자기가 가 본 곳 중에서 쿠알라룸푸르가 가장 인상적이었고 살고 싶은 도시라고 말했다. 쿠알라룸푸르라는 이름조차 생소했던 나는 그곳이 말레이시아의 수도라는 것도 그 친구를 통해 들었다. 쿠알라룸푸르를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어우러진 메트로폴리탄이라고 소개했다. 밀림 속 현대 도시의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공원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문득 그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 친구가 이야기한 매력을 엿볼 수 있었다. 어제 하루 동안 인도인 시장에 갔다가 이슬람 모스크를 둘러보고 저녁으로 중국 음식을 먹었다. 온몸을 새까맣게 감싸고 눈만 빼꼼히 내놓은 무슬림, 화려한 색깔의 사리나 펀자비를 입은 인도인, 길거리 여성들의 옷차림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이슬람, 인도, 중국,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빚어내는 다채로운 종교와 문화를 체험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아시아의 뉴욕, 누군가에게 이 도시를 소개할 때 이런 비유를 써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오늘, KLCC 공원에서 주말 나들이를 즐기며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과 한 번쯤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솔직히 우리 사는 모습과 너무 다른 오지에서는 못할 것 같다. 우리 몸에 익은 현대 도시의 편리함을 누리면서 훨씬 여유롭고 편안해 보이는 이 도시의 삶이 부러웠다. 아이들이 신 나게 노는 모습을 보니 행복했다.
무엇보다 해람이! 해람이가 도착한 날부터 몸을 긁지도 않고 코가 막히지 않아 잠을 잘 잔다. 서울에서 해람이는 아토피와 알레르기성 비염을 달고 살았다. 아토피는 자라면서 좋아졌는데 가을부터 봄까지 해마다 비염으로 고생을 심하게 했다. 밤이면 코가 꽉 막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얼마나 답답할까, 옆에서 보는 것도 안쓰러웠고 잠 못 자는 아이와 같이 잠을 설치는 것이 괴롭기도 했다. 서울을 떠나기 직전에도 비염으로 여러 날 잠을 잘 못 잤고 그만하던 아토피까지 도져서 팔다리 접히는 곳에 발진이 심했다. 여행 가방에 해람이 약을 한 보따리 싸왔다. 만일을 대비해서 먹는 약과 바르는 약을 여러 가지 챙겨왔는데 아직 하나도 열어 보지 않았다. 공기가 좋아서인지, 습도가 높아서인지, 코 막혀서 내는 쌕쌕 숨소리가 사라졌다. 발진이 심하던 곳이 저절로 좋아졌다.
내 아이를 편하게 해주니 나는 이 도시가 정말 좋다. 너무너무 좋다. 한 일 년, 아니 겨울마다, 해람이 비염이 심할 때마다 여기 와 살았으면 좋겠다.
"엄마, 우리 내일 또 여기 오자~"
KLCC 공원에서의 주말 나들이를 마치며 아이들이 한 말이 귓가에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