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화의 어린이책 스테디셀러
처음 가진 열쇠
» 한미화
황선미 지음
웅진주니어 펴냄(2007)
어떤 작가의 책을 읽다 보면 그가 쓴 책을 통해 ‘나만의 그’를 만들어낼 수 있다. 아마 ‘내가 만들어낸 그’와 ‘진짜 그’는 좀 다를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책을 쓴 것은 작가지만 읽는 순간은 독자 것이니까. 황선미의 동화를 따라 읽은 사람이라면 그가 어린 시절 가난하고 힘든 시절을 겪었다는 걸 잘 알 테다. <내 푸른 자전거> <바람이 사는 꺽다리집> <푸른 개 장발> <처음 가진 열쇠> 등은 자전적 요소가 강한 작품인데, 그중에서도 나는 <처음 가진 열쇠>를 좋아한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명자 때문이다. 자의식이 강한 만큼 열등감도 크지만, 책을 읽으며 다른 삶을 꿈꿀 줄 아는 아이다.
초등학교 4학년 명자는 가난한 집 큰딸로 시장에서 일하는 엄마 대신 학교가 끝나면 장작을 때서 밥도 하고 집 안도 치워놓아야 한다. 하지만 명자는 늘 꿈을 꾼다. 명자 같은 촌스런 이름 말고 ‘명지’라고 사람들이 불러주었으면, 예쁜 새 옷을 입거나 책상과 옷장이 있는 방이 생겼으면 하는 상상 말이다. 그러던 명자는 선생님 심부름을 갔다가 1학년 3반 교실을 발견한다. 책장으로 가득한 1학년 3반 교실에 홀린 듯 들어가 교과서와는 다른 책들을 발견하고 읽기 시작한다. 글씨를 훑어 먹듯 책을 읽다 고개를 들면 교실은 텅 비어 있고 날은 저물어 있다. 엄마가 집에 늦게 왔다고 등짝을 후려칠 걸 뻔히 알아도 1학년 3반에 가는 걸 멈출 수 없다. 이런 명자에게 1학년 3반 선생님은 일찍 와서 교실 문을 따놓고 저녁때는 애들이 보던 책을 정리하고 문을 잠그고 가달라며 교실 열쇠를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동화의 시대 배경은 1970년대이다. 마치 ‘응답하라 1970’이라도 되듯 그 시대의 학교 모습이 명자를 통해 복원된다. 부모에게는 향수를 자극할 만한 풍경들이다. 그때 반장은 늘 공부 잘하는 아이가 하고, 반장이 되면 교실 커튼이나 물주전자를 사야 했다. 그래서 가난한 집 아이들은 공부는 잘해도 1등은 하면 안 되던 시절이었다. 또 학교 도서관이 따로 없고 책장 몇 개가 있는 교실이 도서관 노릇을 했다. 이나마도 늘 열쇠가 채워져 있는 날이 많았다. 지금처럼 책이 흔하지도 않고, 독서교육도 없었는데 명자는 스스로 도서관을 발견하고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었다.
누군가 이 세상에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사람은 용기를 내어 살아갈 수 있다. 명자에게는 잘 알지도 못하며 열쇠를 맡기려 한 1학년 3반 선생님이, 1학년 3반을 통해 만난 책이 그런 구실을 했다. 작가 황선미는 “책을 읽기 참 잘했다는 생각을 늘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느 골목에서 지치고 슬픈 가슴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차마 이루지 못한 소망 때문에 비루한 삶을 혐오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라고 쓴 적이 있다.
문학을 알고 나면 혼자 있어도 더는 외롭지 않은 법이다.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 없다 해도 책을 통해 삶을 찾아갈 수도 있다. 강남 8학군보다 소외된 지역의 독서교육이 더 절실한 이유다.
한미화 출판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