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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성유전학
2011년 8월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첫아이를 낳은 산모의 평균연령이 31.25세로 2009년에 비해 0.29세 높아졌다. 30세가 넘어 초보 엄마의 대열에 합류한 요즘 엄마들은 분명히 우리의 어머니와는 다른 세대다. 요즘 엄마들은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임신을 계획했을 때부터 먹는 것과 행동도 조심하고 육아책도 많이 읽는다. 클래식을 듣고 명화를 감상하며 태어날 아이의 두뇌 발달을 위해 영어 CD와 영어 노래를 듣는다. 주말이면 근교에 나가 자연과 접하며 뱃속 아기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태담을 들려준다. 임신부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아이의 두뇌발달에 태내환경이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1980년대 데이비드 바커(David Barker)는 '출생 시 저체중일수록 중년에 심혈관질환에 더 많이 걸린다'는 바커가설(Barker hypothesis)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심혈관질환, 중풍, 당뇨병 같은 ‘성인병’은 나쁜 생활습관 때문이라는 사회적 통념으로 인하여 이 이론은 무시되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뒤 이 가설은 태아가 자궁 안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이를 토대로 태어난 후의 삶을 계획한다는 태아프로그래밍으로 부활한다. 태아는 뱃속 환경이 어려우면 바깥세상도 힘들 것으로 예측해서 그에 맞게 뇌와 신체를 적응시킨다는 것이다. 임신부가 먹는 음식, 숨 쉬는 공기, 느끼는 감정까지 태아와 공유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후성유전학에서는 생명 현상은 유전자와 환경의 복잡한 상호작용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이고 태내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고지방식을 즐기는데도 심장이 아주 건강한 사람은 태아기 때 영양 공급을 충분히 받아 지방과 콜레스테롤을 잘 분해하도록 프로그래밍되었기 때문에 심장질환이 잘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존 크럴 교수는 비만조차도 아이가 부모의 유전적 소인이 없고, 출생 후 식생활에 문제가 없어도 태내 환경에 의해 비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헤이만스 교수는 엄마 뱃속에서 굶주림을 겪는 형제의 DNA에서 IGF-2라는 성장유전자의 기능이 멈췄음을 발견했다. 형제 간에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누구는 이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반면 누구는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DNA는 G구아닌, A아데닌, T티민, C시토신이라고 하는 4가지의 기호를 가지고 저장한다. 그런데 최근 학자들은 C시토신에는 메틸기라는 분자(CH3)가 붙어있는 경우가 있고 안 붙어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긴 실타래 모양을 한 DNA는 쭉 펴져야 사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데, 메틸기가 붙게 되면 확 감기면서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결과적으로 메틸기는 우리 몸의 유전자를 켰다 껐다 하는 스위치 역할을 하는 셈이다. 태아기 때 굶주림에 노출된 사람들의 IGF-2를 보니 정상인에 비해 너무 적게 메틸기가 붙어있었다. 그로 인하여 IGF-2가 지나치게 활성화되어 남들보다 성장이 빨라져서 비만이 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미국 신시내티대학교 석메이호(Shuk-mei Ho)교수는 임신기간 동안 교통이 혼잡하여 대기 오염 가스가 많이 배출되는 뉴욕 맨해튼 북쪽과 브롱크스 남쪽 지역에 사는 여성들이 낳은 아기들이 공기가 깨끗한 지역에서 태어난 아기들보다 호흡에 관여하는 ACSL3유전자에 메틸기가 붙어 호흡기능의 스위치가 꺼지면서 천식이 더 많다는 사실을 발표하였다. 엘베르트 교수는 임신 중 남편의 폭력을 많이 경험한 여성의 아이들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조절하는 글루코코티코이드 수용체 유전자에 메틸기가 붙어 스트레스를 억제하는 스위치가 꺼져 더 두리번거리고 불안해하거나 모험심도 적게 나타났다고 보고하고 있다. 문제는 유전자의 스위치를 켜고 끄는 메틸화는 평생 계속된다는데 있다. 아이들의 식습관과 운동, 스트레스 관리와 같은 환경이 유전자의 메틸화에 언제든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설령 아이가 건강이 좋지 않게 태어났더라도 사는 동안 언제나 회복할 수 있는 생물학적 회복탄력성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키와 지능, 기질과 성격까지 자궁환경에 의하여 결정된다.
경제학자 앤 케이스(Ann Case)는 키는 인지능력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키가 큰 사람이 노동시장에서 후한 대접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케이스와 크리스티나 팩슨(Christina Paxson)은 영국인과 미국인을 대상을 출생부터 성인 시기까지 신장 기록과 시험 점수를 검토한 결과 키가 큰 아이들이 IQ검사에서 평균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발표하였다. 키와 IQ 모두 엄마의 임신 당시 건강과 영양상태, 흡연, 음주, 기타 약물 복용 여부 그리고 태아가 유해물질에 노출되었는가 하는 태내환경에 의하여 영향을 받기 때문에 키와 IQ가 상관성이 높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늦여름이나 이른 가을에 태어난 아이들이 10살이 되어 키가 1cm 더 크고 뼈도 굵다고 한다. 이는 임신부가 임신기간 동안 더 많은 햇볕을 받아 뼈를 만드는 비타민D 생성이 촉진됐기 때문이다. 이 요인들은 인지능력에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미친다. UCLA대학의 샌들라 블랙(Sandra Black)은 1967년에서 1987년 사이 노르웨이에서 태어난 쌍둥이들에 대한 연구에서 쌍둥이 중 출생 시 체중이 높은 쪽이 평균적으로 IQ가 높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다중지능이론의 주창자인 하워드 가드너(Howard Gardner)는 출산을 전후로 매일같이 건강에 좋은 환경에 놓인 아이와 숱한 위험에 노출된 아이를 IQ를 비교한 결과, 좋은 IQ를 가지려면 건강한 태내 환경에서부터 누적된 긍정적 효과와 이를 촉진시킨 생후 환경이 모두 중요하다고 하였다. 1997년 버너드 데블린(Bernard Devlin) 등은 <네이쳐>에는 태내 환경이 IQ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한 결과 20%가 태내 환경의 영향이고 유전자의 영향은 34%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태내 환경이 지능에 미치는 영향은 아이가 자라는 시기보다 크면 컸지 작지 않으며, 태내 환경이 열악한 임신부의 영양상태와 출산 전 건강관리를 개선한다면 태어날 아이의 IQ를 높일 수 있는 거라고 하였다. 태내환경은 기질이나 성격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서울대학교 이희정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임신부의 우울 수치가 높을수록 아이의 까다로운 기질 수치가 증가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 이유는 덴버대학교의 엘리샤 데이비스 교수의 지적처럼 우울증이 있는 임신부의 높은 코르티솔 수치가 태아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정신질환조차도 태내환경의 영향이 크다.
모성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옥시토신은 분만과 출산, 육아과정까지 관장하는 호르몬으로
영국 캠브리지대 사이먼 바론-코헨(Simon Baron-Cohen)교수에 의하면 태아의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았던 아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에 비해 1살에는 눈을 마주치는 횟수가 적었고, 2살에는 더욱 제한된 어휘를 구사했으며, 4살이 되어서는 사회적 행동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8살에는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또한 태아 테스토스테론이 높으면 유아기에 관심사의 범위가 좁은 대신 일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등 체계적인 면에 강한 흥미를 보였으며, 자폐증 징후도 훨씬 많았다.
연구에 따르면 형이 많을수록 동성애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캐나다의 앤서니 보개트(Anthony Bogaert)교수와 레이 블랜차드(Ray Blanchard)교수에 의하면 남자아이를 임신한 여성의 면역체가 태아가 만들어낸 단백질에 대해 항체를 생성한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 임신부가 다시 다른 남자아이를 임신하면 그 항체가 태아의 뇌 발달에 작용해 아이를 동성애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태내환경을 개선시켜라
열악한 사회경제적 여건이 태내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막강하다. 사회경제적 여건이 열악한 임신부는 음주와 흡연과 약물복용을 할 가능성이 크고, 불충분한 식사를 할 가능성이 크다. 간접흡연을 포함해 산업체의 배기가스, 살충제, 납성분 등 더 많은 유해물질에 노출된다. 일상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더 많아 우울증이나 불안장애가 발생하기 쉬울 뿐 아니라 더 많은 트라우마를 겪고, 그 문제를 처리하도록 도와줄 곳이 더 적다. 건강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경우에는 적절한 산전관리를 받지 못해
조산이나 저체중아 출산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태내환경은 사회적 경제적 여건에 의하여 많이 좌우된다. UCLA의 경제학자인 도라 코스타(Dora Costa)에 의하면 1900년에 49세이던 기대수명이 오늘날 77세로 대폭 상승한 원인은 출산 전과 직후의 조건이 개선된 것이 16%이상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산전관리의 접근성과 질이 향상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임신부들에게 몸에 좋은 식사가 제공되고, 자연재해나 테러 같은 위급 상황에서 임신부를 보호하기 위한 계획이 있어야 하며, 스트레스를 낮추는 프로그램이 임신부에게 적용
되어야 한다. 태아에게 위협이 되는 화학물질을 규제하거나 금지하고, 약물 중독 치료와 금연 프로그램을 해당 물질에 중독된 임신부가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임신부가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기타 정신질환에 걸리지 않도록 예방하고, 문제가 발견된 경우 상담과 치료가 이루어져야 한다. 임신했을 때만 생기는 임신성 당뇨병은 임신 중에 당 대사의 변화로 생기는데, 임신부의 당뇨병에 노출된 태아는 당뇨병 발병 위험이 높아진다. 당뇨병이 있는 임신부의 혈당치를 임신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면 아이의 당뇨병 발병률을 현저하게 감소시킬 수 있다.
산전관리의 핵심은 태아와 유대관계다. 모성유대라는 개념은 예전에는 갓 태어난 아기와 산모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의미하였다. 갓 태어난 아기를 만지고 알아주었던 산모들은 이후 아이를 키우는 육아 기술도 더 훌륭하고, 아기가 발달검사에서 더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이제는 모성유대를 태아 때부터 시작하며, 초음파스크린의 태아를 보고 애착을 느끼려고 하고 있다.
좋은 엄마란 무엇인가» 한겨레 사진 자료
이 후성유전학은 태내뿐 아니라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발휘된다. 캐나다의 심리학자 마이클 미니(Michael Meaney)는 새끼 쥐를 잘 보살피는 어미 쥐에서 태어난 새끼 쥐를 우리에서 꺼내 새끼 쥐를 잘 보살피지 않은 어미 쥐에게 키우게 했다. 낳아준 엄마 쥐는 양육의 질이 높지만 실제 길러주는 어미 쥐는 양육의 질을 낮게 만든 것이다. 새끼 쥐가 어미가 되어 자신의 새끼를 키우는 것을 관찰해보니, 새끼 쥐는 낳아준 어미 쥐보다 길러준 어미 쥐의 양육 태도를 취했다. 더 놀라운 것은 새끼 쥐의 뇌를 촬영해보니 정서적인 것을 담당하는 뇌 부위의 발달이 낳아준 어미 쥐보다 길러준 어미 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관찰되었다. 낳아준 엄마보다는 길러준 엄마가 아이 정서의 뇌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는 의미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모유를 빨리고, 유기농 재료로 이유식을 손수 만들어 아이에게 먹인다. 아기의 연령별 두뇌발달에 따라 뇌기반 자극을 주고, 생후 6개월부터는 문화센터에 다니고 요즘 유행하는 전집교구와 장난감으로 아이의 두뇌 계발을 돕는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면 한글과 영어 선행학습을 시작하고, 주말에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으로 체험학습을 다닌다. 아이가 아무리 말썽을 부려도 자녀 교육서를 따라 아이를 잘 타일러야 한다. 이 뿐이 아니다. 엄마라면 교육정보에 능통해야 하고, 육아를 책임져야 하며, 아이가 최우선이어야 하며, 아빠와의 관계를 좋게 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아야 한다. 더구나 이 시대는 아이의 재능을 빨리 알아봐야 하고, 아이에게 비전을 제시해줘야 하고, 아이의 미래에 대한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 요즘 엄마는 갑자기 슈퍼맨이라도 되었단 말인가? 그러나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려면 슈퍼우먼이 되어서 만들어가는 긴장된 모성이 아니라 아이와 상호작용하고 유대감을 만드는 편안한 모성이어야 한다. 아이가 원하는 가장 좋은 엄마는 슈퍼맘이 아니라 편안한 엄마다. 아이가 엄마의 표정이나 말도 편안하다고 느껴야 하며, 혹시 아이가 많은 요구를 하더라도 능력에 부치면 못하겠다고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