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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석의 내가 사랑한 그림책] 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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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한림출판사 제공

서천석의 내가 사랑한 그림책

장갑
에우게니 라쵸프 지음, 이영준 옮김/한림출판사 펴냄(1999)

우리는 흔히 아이들이 자기중심적이고 불편한 것은 견디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들의 일면일 뿐이다. 아이들은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활동을 좋아하기 때문에 재미만 있다면 자신에게 조금 손해가 있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혼자 재미난 것보다는 함께 즐거울 때 더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된 아이들은 기꺼이 불편함도 감수한다. 다만 강요받고 싶어하지 않을 뿐이다.

많은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양보나 배려의 가치를 가르치려고 노력한다. 좋은 일이다. 양보와 배려가 아이들을 더욱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보나 배려가 아무리 좋은 가치라고 하더라도 강요하는 순간 아이들은 양보하고 싶어하지 않고 타인에게 배려하려 들지 않는다. 양보란 내가 가진 것을 일방적으로 상대에게 내어놓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눔으로써 다른 차원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양보가 일방적인 희생이라면 오래가지 못한다. 혼자서는 느낄 수 없는 함께하는 즐거움을 느끼려는 적극적인 행위다.

에우게니 라쵸프가 우크라이나의 전래동화를 각색하여 만든 <장갑>에는 양보라는 말도, 배려라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림책을 읽어가다 보면 아이들 마음속엔 친구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올라온다. 함께하기 위해 내 공간을 포기하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희생이 아니다. 오히려 즐거움이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할아버지가 산길을 가면서 떨어뜨린 장갑을 쥐가 발견하고 집으로 삼는다. 지나가던 개구리가 그 집을 발견하고는 함께 살자며 뛰어들어온다. 다음에는 빠른 발 토끼가, 그다음에는 멋쟁이 여우가 들어오고 회색 이리와 멧돼지까지 들어오자 장갑은 터지려고 한다. 그런데 설상가상 커다란 곰도 들어오고 싶어한다. 하지만 누구도 거절하지 않는다. 장갑은 이제 일곱 마리 동물로 가득 차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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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석 소아정신과 의사
합리적으로 따져보자면 말이 안 된다. 쥐가 쏙 들어갈 정도의 아담한 장갑에 어떻게 곰과 멧돼지까지 들어갈 수 있겠는가? 아이들도 그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그래서 이 책을 더 재밌어한다. 상상을 통해 불가능한 일을 꿈꿀 수 있으니까. 아무리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음식이나, 아무리 사용해도 남는 황금알 이야기처럼, 좁지만 계속해서 점점 더 큰 짐승이 들어올 수 있는 신비한 장갑은 아이들에게 충분히 매혹적인 이야기다.

60년도 더 된 오래된 그림책이라 화풍이 낯설고 인쇄 상태 때문인지 분위기도 다소 어둡다. 하지만 이 책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 조금씩 변주되면서 긴장감을 더해가는 반복 구조는 아이들이 가장 편해하는 이야기 틀이다. 유아들이 좋아하는 동물도 잔뜩 등장한다. 리듬감 있게 이어지는 글은 읽는 맛이 있고, 조금씩 변해가는 장갑 그림은 무엇이 달라졌는지 찾아보는 즐거움을 준다. 추운 겨울 함께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이와 읽기 딱 좋은 그림책이다.

서천석 소아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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