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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베이비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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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된 ‘트루먼쇼’…“언제까지 날 엿볼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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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 TV프로그램 범람…가상인물 통해 본 폐해

이른바 ‘관찰예능’ 프로그램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태아 때부터 영유아, 10대, 20대를 거쳐 노년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모든 시간대가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되고 있는 셈이다. 노출이 직업인 연예인 자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 자아 형성이 되지 않은 영유아 등의 경우 자아 형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일부 인권 침해 소지도 있다고 한다. 관찰당하는 여러 출연자를 한 사람의 시선으로 그려봤다.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때부터 집안 곳곳에 CCTV가 설치됐고
출산마저 예능소재로 쓰였다
목욕을 할때도 ‘응가’를 할때도 카메라 렌즈는 늘 쫓아다녔다

TV로 늘 날 지켜본 사람들은 칭찬 혹은 비난을 쏟아냈고
사춘기엔 인터넷이 무서워졌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무뎌진 걸까? 결혼한뒤 아이와 집을 공개했다

할머니가 돼선 벗어날줄 알았는데 이번엔 사위와 함께 카메라 앞에
이쯤되면 평생을 감시당한 셈이다
외국선 죽음 관찰 사례도 있던데 혹시 내가 그리되지나 않을는지…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 0살

내가 아직 엄마 뱃속에서 세상으로 나가기 전이었다. 집안 곳곳에는 폐회로텔레비전(CCTV) 카메라가 설치됐고, 굴사남, 홍지민 등 출산을 앞둔 엄마들의 일상을 24시간 쫓았다. ‘태교 예능’이라면서 엄마의 모습을 담는 프로그램이었지만, 나는 태아 시절부터 텔레비전에 출연한 셈이다. 심지어 태어나는 과정까지 나는 예능의 ‘소재’였다. 방송사는 “굴사남의 출산 현장을 공개한다”고 홍보했고, 호기심의 대상이 됐다.(<엄마의 탄생>, 한국방송1)

미국의 정신과 의사 토머스 버니는 <태아는 알고 있다>는 책에서 “태아는 6개월부터 엄마의 사고와 감정을 느낀다”고 했다. 카메라가 찍는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관찰당하는 엄마의 행동과 감정의 변화는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얘기다. ‘재미를 위한 설정’도 스트레스가 됐다. 할머니(굴사남의 시어머니)는 뱃속의 내가 아들이라는 소리에 대놓고 싫은 내색을 했다. 진짜인지 설정인지 모르지만, 나는 어렴풋이 이를 느낄 수 있었다. 2007년 미국 과학잡지 <네이처 뉴로사이언스>에 발표된 연구결과는 “태아의 성격과 인지능력은 유전보다는 태내 및 출생 직후의 환경에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 1~7살

태어난 뒤에도 이런 상황은 이어졌다. 백일부터 보행기를 타는 갓난아이 시절 <엄마의 탄생>의 카메라는 나를 따라다녔다. <오 마이 베이비>(에스비에스), <슈퍼맨이 돌아왔다>(한국방송2·이하 <슈퍼맨>)까지 나를 관찰하는 눈은 더 늘어났다. 프로그램이 많아진 탓일까. 카메라는 나한테 더 가까워졌다. 보행기에도 카메라가 달려 있고(<엄마의 탄생>), 장난감 수레를 타도 어김없이 카메라가 달려 있었다.(<슈퍼맨>). 목욕을 할 때도, 힘겹게 ‘응가’를 할 때도(<슈퍼맨>) 카메라 렌즈는 나를 놓치지 않았다. 한 달에 이틀, 잠에서 깨면 마법처럼 어느샌가 그곳에 달려 있었다.(<슈퍼맨>) 한 집에 카메라가 10대 정도 된다고 했다.

3살 때, 아파트 거실에는 ‘작은 집’이 있고 거기엔 ‘삼촌’(카메라맨)이 산다는 걸 알게 됐다.(<슈퍼맨>, 서준·서언) 4살이 돼서는 아침마다 거실 안 삼촌네 집에 찾아가 인사를 했다.(<슈퍼맨>, 삼둥이) “아저씨 거기서 뭐 하세요?”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삼촌들은 2~3명이 돌아가며 자리를 지켰고, 작은 구멍으로 김밥을 받아먹기도 했다. 한 방송사 피디는 “아이들에게 잘못된 어른관을 심어줄 수도 있다”고 걱정했지만, 사람들은 삼촌들한테 인사하는 나를 보면서 ‘예의 바르다’고만 했다. 아빠의 손을 잡고 밖에 나가면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켜봤다. 만지고 쓰다듬고 휴대전화로 나를 찍었다. 그런 사람들이 무서워 울기도 했다.(<일밤-아빠 어디 가>, 문화방송)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는 “주시불안이라고 해서 아이들은 낯선 사람이 자기를 주목하면 긴장감과 두려움을 갖게 되고 본능적으로 방어적이 되어 경계심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 10대, 사춘기

초등학생이 되고, ‘세상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제대로 알기 시작했다. 중학생이 되고 사춘기가 되면서 친구들이 나를 놀렸다. 또 사람들이 티브이 속 ‘편집된’ 내 모습을 온전히 나라고 믿는 걸 알고 부담감이 커졌다. 텔레비전에선 부모와 티격태격하는 모습, 형제자매와 부닥치는 것 위주로 방송됐다.(<유자식 상팔자-사춘기 관찰 카메라>, 제이티비시) 칭찬이나 비난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제는 인터넷에 들어가는 것이 무서워졌다. 인터넷에서 나를 찾아보면, 어김없이 악플이 달려 있었다. 엄마가 고3인 누나를 챙기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아들로 돼 있었다.(<유자식 상팔자>) 오은영 박사는 “자기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 사이의 차이가 크면 정체성이 흔들리게 된다. 자아가 단단해지기 전에 남에게 보여지는 모습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을 쓰다 보면, 올바르게 성장할 수가 없다”고 했다.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에 아역 ‘미달이’로 나와 인기를 끌었던 김성은도 방송에서 “커서도 ‘미달이’ 캐릭터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녀 우울증에 자살 충동까지 느꼈다”고 했다.

그래도 중학생이 되면서 나한테 출연 여부에 대한 ‘결정권’이 생긴 건 다행이었다. 영유아 시절엔 연예인 엄마, 아빠가 이를 결정했다. 또 어른들은 ‘자막’을 통해 내 감정과 생각을 자기들 편한 대로 해석했다.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윤정주 소장은 “<슈퍼맨>에서 사랑과 만세의 러브라인을 형성한다든지, 아이가 아무 뜻 없이 한 행동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어른의 마음으로 아이의 마음을 재단하는 건 문제”라고 했다. 황옥경 서울신학대 보육학과 교수도 “중요 부분만 가린 채 아이의 알몸을 보여주는 것도 아이의 인권에는 문제가 없는지 짚어봐야 한다”고 했다.

■ 20대~중년~노년

이제는 익숙해진 것일까. ‘어딜 가나 나를 알아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신을 발견했다.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건 달콤쌉싸름한 유혹이다. 사실, 연예인 부모를 둔 덕분에 받는 혜택도 많았다. 어릴 때는 ‘그날’만 되면 새 옷을 입었고, 새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 아빠와 갔던 체험전, 테마파크 등도 대부분 간접광고였다. 20대가 되어 배우를 꿈꾸면서는 <아빠를 부탁해>(에스비에스)에 출연해 얼굴을 알렸다. 출연료까지 받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일생을 시시티브이에 관찰당하면서 산 삶도 이제는 적응이 됐나 보다.

어른이 되고 연예인 배우자를 만나, 아이와 집안을 공개했더니 광고 촬영도 들어왔다.(<슈퍼맨>) 지금은 종영한 종합편성채널의 한 부부 관찰 프로그램에 나가기도 했다. 남편의 윽박지름을 받아주고, 갈등을 약간 부풀려 표출했더니 ‘재미있다’며 불러주는 곳이 많아졌다. 종편의 부부 관찰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한 아내는 “방송은 나를 이상한 여자처럼 만들어놨다”고 했다. 할머니가 돼서는 사위와 함께 또 카메라 앞에 섰다.(<자기야-백년손님>, 에스비에스) 이쯤 되면 평생을 카메라 앞에서 살아온 듯하다. 한 방송사 피디는 “요즘 티브이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일생을 감시하는 셈”이라고 했다.

■ 죽음까지?

사람들은 “아이들은 꾸미지 않는 모습이 예쁘고, 부부와 장인-사위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재미있다”고 환호했다. <자기야>(7.5%)와 <슈퍼맨>(16.6%)은 최근 방송을 기준으로 동시간대 시청률 1위이고, <아빠를 부탁해>는 파일럿 방송이 14% 정도를 기록했다. 그러나 보고만 있어도 흐뭇해진다고 언제까지 나를 관찰할 것인가. 미국의 한 아동심리학자는 “출생 후 5년 내의 경험이 일생 동안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중요한 작용을 한다”고 했다. ‘감시카메라’와 함께한 나의 5년은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황옥경 교수는 “아이에 대해 갖고 있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아무도 예측하기 어렵다”고 우려했다.

영화 <트루먼 쇼>(1998년)를 보면서 사람들은 ‘이건 단지 영화일 뿐이야’라고 생각했다. 17년이 지난 지금, <트루먼 쇼>는 현실이 되고 있다. 2002년 영국의 관찰 예능 <빅 브러더>에 출연한 제이드 구디는 ‘독설 캐릭터’로 인기를 얻었다. 프로그램에서 하차한 뒤 관심에서 멀어지는 게 두려웠던 구디는 자궁암 말기 선고를 받자, 당시 80억원을 받고 방송사에 자신의 시한부 삶에 대한 중계권을 팔았다. 죽는 모습조차 관찰의 대상인 된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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