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사람] 조은영 한국릴리 인사담당 상무
조은영 한국릴리 상무가 지난 5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 사무실에서 한국릴리의 여성 친화 경영 제도를 소개하고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다국적 제약회사 일라이 릴리의 한국지사 직원 조은영(39)씨는 출산휴가를 2주 앞두고 있던 2013년 4월 사장의 호출을 받았다. 네덜란드인인 폴 헨리 휴버스 사장은 뜻밖의 제안을 했다. 휴가를 다녀온 뒤 인사 담당 임원을 맡아달라는 것이다. 지금은 3년차 임원이 된 조 상무는 “3개월의 출산휴가를 앞두고 있는데 임원 승진이 결정됐다. 휴가 기간 동안 무슨 공부를 하고 올까 물었더니 ‘아이와 당신에게 가장 특별한 기간이다. 아무 생각 말고 충분히 즐기고 오라’고 했다”고 그날을 떠올렸다.
지난 5일 서울 중구 한국릴리 사무실에서 만난 조 상무는 사장을 제외한 임원 9명 중 1명이다. 9명 중 6명이 40대 여성으로 여성 임원 비율이 높다. 전체 임직원 280여명 가운데 36%가 여성이다. 130여명이 근무하는 서울 본사는 여성 비율이 67%로 더 높다. 인슐린을 처음 상용화한 제약사 일라이 릴리는 2013년 기준 매출액이 24조3000억원 규모다. 한국 매출은 1427억원이었다.
2004년까진 여성 임원 없었지만 여성친화형 제도 도입하니 변화
사정 따라 출·퇴근 시간 자유롭게…필요하면 재택근무도 신청 가능
여성 임원이 많은 이유를 회사 내부에서는 ‘제도 개선의 결과’로 보고 있다. 조 상무는 “1982년 한국에 진출한 뒤 2004년까지는 여성 임원이 1명도 없었다. 유럽 등 서구 국가와 달리 아시아에서는 육아와 일을 동시에 맡는 여성의 이중고를 덜어줄 제도가 없어 경력이 단절되곤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면서 10년 사이 여성 임원 비율이 증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먼저 출퇴근 시각이 자유롭다. 8시간 기준만 지키면 된다. 그는 “대학원에 다니는 직원은 오전 7시~오후 4시에, 자녀가 있는 분은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오전 10시에 나와 저녁 7시까지 근무한다”고 말했다. 출퇴근 시각은 3개월마다 조정한다. 단 공통 근무 시간으로 오전 10시~오후 4시엔 나와야 한다. 매달 마지막 금요일은 ‘패밀리 데이’로 오후 3시 조기 퇴근한다. 혹시 일찍 퇴근하지 않고 다른 업무 일정을 잡을까봐 올해부터 사장이 전 직원의 일정 관리 시스템에 오후 3시부터를 ‘사장 미팅’으로 잡아놨다고 한다.
재택근무도 가능하다. 조 상무는 “업무 특성상 혼자 집중하는 일이 많거나 해외 지역 업무를 담당하는 분들은 재택근무가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고 보면 신청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임원 중 법무 담당과 해외 담당은 재택근무 중이다.
조 상무도 2010년 재택근무를 했다. 게다가 독일에서였다. 그가 아시아·중동·남아프리카 지역 등을 담당하는 매니저일 때 다른 회사에 다니는 남편이 독일에 1년간 파견을 가게 됐다고 한다. 그는 “대개 여성들이 그런 상황에 놓이면 회사를 그만두고 남편을 따라갈 것인가, 회사에 남을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서는데 회사의 배려로 해외에서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장소와 관계없는 근무는 스마트워크 환경 덕분이다. 한국릴리 사무실에는 정해진 자리가 없다. 그날그날 소통해야 하는 직원끼리 모여 어느 자리에나 앉을 수 있다. 퇴근할 때 짐을 사물함에 두고 간다. 어디서든 같은 번호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게 소프트폰이 노트북에 탑재됐다. 임원실도 없다. 조 상무는 8인용 테이블에 “햇볕이 잘 드는 구석 자리”를 선호한다. 자유석에는 칸막이 자리와 탁 트인 자리를 동시에 뒀고, 원하는 직원은 자유석이 아닌 고정석에 앉을 수 있다.
약대를 졸업한 뒤 릴리에서 영업사원, 지점장 등의 경력을 쌓은 조 상무는 “‘여성에게 불이익을 주면 안 된다’는 개념을 넘어서 여성도 동등하게 업무를 수행하고 회사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에 여성 인력 개발에 투자하는 것”이라며 “영업부서에 여성 비율이 낮은 편이라 여성 영업사원들이 계속해서 근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현재 일의) 우선순위”라고 덧붙였다.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