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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때리기 권하는 사회 / 남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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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지난해 10월 서울 시청광장에서 ‘멍때리기 대회’가 열렸다. 3시간 동안 가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사람을 가리는 대회에서 초등학교 2학년생이 우승을 차지했다. 그런데 얼마 전 한 방송에서 이 어린이의 사연이 알려졌다. 9살 어린이가 하루 6곳씩 학원을 다녀야 하니 매일 쌓이는 피로와 압박을 멍때리는 것으로 풀어왔다는 것이다. 올해는 중국 광둥성에서도 ‘멍때리기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도 수상자들은 죄다 어린이들인 것을 보면 우리나라 어린이들만 멍때리기를 잘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아이들의 스트레스는 대개 부모들의 쫓기는 삶에서 비롯된다.” 최근 출간된 <타임푸어>에 나오는 분석이다. 부모들이 남보다 바쁘게 살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사회이기에 아이들도 바쁘다. 스웨덴의 인지신경과학 전공 교수인 토르켈 클링베리는 사람의 뇌가 한꺼번에 일곱 가지 이상의 정보를 저장하려 하면 멍한 상태가 된다고 했다. 과잉 정보, 역할 과부하 상태에 시달리는 우리들은 멍해지기 쉬운 조건 속에서 산다. 뇌의 전전두엽 부분을 활성화한다며 멍때리기를 예찬하는 과학자도 있지만 앞뒤가 바뀌었다. 멍때리기는 정보를 처리하려고 애쓰는 상태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들의 가짓수와 책임감 같은 노동밀도가 지나치게 높으니까 큰 탈이 나지 않도록 뇌가 조절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늘 바쁘고 시간 압박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시간 빈곤자라고 한다. 사회적으론 시간 빈곤이란 1주일 168시간 중에서 개인 관리와 가사·보육 등 가계 생산에 필요한 시간을 뺀 시간이 주당 근로시간보다 적을 경우를 말한다. 지난해 고용노동부 산하 기관인 한국고용정보원이 미국의 레비경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진행한 ‘소득과 시간 빈곤 계층을 위한 고용복지정책 수립 방안’ 연구에 따르면 한국 전체 노동인구의 42%가 시간 빈곤 상태다. 그런데 다른 재화처럼 시간도 절대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선 낮은 계층 사람들은 먹고, 자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노동시간을 늘려야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면 바쁘다고 해도 어떤 일에 몰입할 시간을 스스로 정할 수 있지만 지위가 낮은 사람, 여자, 어린이들일수록 남들이 요구하는 일들을 하기 위해 자신의 하루를 무작위로 쪼개야 하니 시간의 질이 떨어진다는 문제가 있다. 미국에선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환자 중 중년 여성들의 수가 급속도로 늘고 있다. 2001년과 2011년을 비교해보면 중년 여성들이 집중력을 높여주는 약을 처방받은 비율이 264% 증가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시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어떤 일을 하면서 머릿속으론 다른 할 일에 쫓기는 상황을 ‘오염된 시간’(contaminated time)이라고 부른다. 24시간 자잘한 일거리가 자꾸 끼어들면 쉬는 시간도 오염된다. 다음 할일에 초조해지는 시간, 잘게 쪼개진 시간은 충전과 휴식이 되기 어렵다. 멍때리기는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가는 사이에 잠깐 쉬는 어린이들이나, 점심시간을 이용해 집안일을 챙겨야 하는 일하는 엄마들, 퇴근 뒤나 주말에도 틈틈이 이메일을 확인하고 전화를 해야 하는 회사원들이 쉼을 얻으려는 나름의 방법이다.

남은주 기자
남은주 기자
그런데 멍때리기는 ‘시간 빈곤자’들을 위한 괜찮은 대안일까? 요즘 학부모들 사이에선 멍때리기가 뇌 이완을 유도하고 창의력을 높인다는 말이 퍼지면서 자녀의 멍때리기를 따뜻한 시선으로 보자고 하지만 터무니없는 소리다. 푹 자고 싶다고 했더니 잠깐 졸아도 된다고 대답하는 것과 다름없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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