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프리즘]
“엄마, 난 처음부터 끝까지 눈 꼭 감고 귀 막고 있었다!”
최근 한 유명 테마파크에서 가장 인기 많은 놀이기구를 탄 뒤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오랜만에 생긴 휴가에, 애한테 많이 보여주고 많이 들려주고 싶어 휴양지 대신 선택한 체험학습이었는데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니!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보자며 식전부터 입구 앞에서 줄을 세웠다. 우리보다 먼저 와 있던 관람객들을 비집고 놀이기구까지 숨넘어가게 뜀박질도 시켰는데…. 아이의 입에서 “신난다” 대신 “무섭다”는 말이 튀어나오는 걸 듣고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놀이동산의 동의어는 피곤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뭐에 홀려서’ 그곳을 찾았나 되짚어 봤다. “애가 환장할 거야”라는 유경험자의 말이 결정적 계기였다. 한 명은 자녀가 없는 신혼부부였다. 다른 한 명은 아이가 초등 고학년인 학부모였다. 어른과 큰 아이들한테는 ‘스릴’ 있는 놀이기구가 어린아이한테는 ‘공포’일 수 있다는 상식을 잊었다. 우리 애만 이상한가 찾아보니 나처럼 돈 쓰고 반성문 쓴 어린아이 부모들이 꽤 있었다. 제때를 무시하고 남들이 ‘좋다는 것’을 좇다가 치른 값비싼 교훈이었다.
새내기 학부모로서 지난 1년은 ‘적기교육’과 ‘각기교육’에 대해 아이로부터 ‘부모교육’을 받은 훈련 기간 같았다. 공부나 체험학습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면에서 아이는 벌써 자기 때와 자기 취향이 있어, 엄마의 간섭이 부질없다는 것을 수시로 깨닫게 만들었다.
1학기 내내 아이의 교우관계가 나의 최대 관심사였다. 회사 다니는 엄마 때문에 친구 하나 없이 외로운 학교생활을 하게 될까봐 걱정이 이성을 앞질렀다. ‘아이 친구 만들기’에 적잖이 공을 들였으나, 착각은 한 학기를 넘기지 못했다. 2학기 학부모 상담 시간,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설문지가 자못 충격적이었다. 아이가 적은 ‘친한 친구’ 칸에는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들의 이름이 빼곡했다. 아이는 엄마 없는 교실에서 자기 친구와 자기만의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엄마가 안달하는 교우관계는 이미 아이한테 의미가 없었다.
방과후 활동과 학원을 선택하는 문제에서도 ‘엄마의 욕심’은 자연스레 쪼그라들었다. 요즘 학교에서는 인성·예능 교육의 하나로 1인 1악기 활동을 강조한다. 방과후 수업 등을 통해 바이올린 같은 작은 악기를 배우는 아이들이 많다. 아이한테 바이올린을 권유했더니 리코더를 고집했다. “리코더도 1인 1악기”라는 아이한테 왜 바이올린이어야 하는지 설명할 논리가 없었다. 여름방학 땐 수영을 배웠으면 했지만 아이는 줄넘기 학원을 택했다. ‘줄넘기를 어디다 쓰려고 학원까지 다니는가’ 말리고 싶었지만, 아이는 특기란에 ‘줄넘기’라고 쓰고는 뿌듯해한다.
실없는 농담이지만 아이가 언어 천재일 줄 알았는데 국어·영어는 재미없다며 김을 뺐다. 수학 영재인 줄 알았는데 “우리 반에서 나랑 짝꿍만 구구단 못 외웠을걸?” 하며 천하태평이다. 문과일까 이과일까 내심 궁금했는데, 학교에서 받아온 적성검사표를 보니 떡하니 예체능이다.
2월이면 자녀의 취학을 앞두고 예비 학부모들의 불안이 평정심을 집어삼키는 때다. 1학년 학부모로, 교육담당 기자로 한 해를 살아보니 적기와 각기라는 교육의 순리를 따를 때 아이와 나 모두 행복하다. 다행히 대부분의 아이들은 걱정했던 것보다 학교생활에 잘 적응한다. 여러 학부모의 얘기를 들어보면 기대만큼 잘하는 아이가 많지는 않다. 하지만 아이가 모자라는 게 아니라 부모가 넘치는 게 문제라는 걸, 시간이 곧 알게 해준다.
전정윤 사회정책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