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둥~ 떠.난.다.
비행기가 떠오를 때 나는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덜덜덜, 거친 기계음을 내며 활주로를 질주하다가 부웅~하고 날아오를 때, 스스로 도움닫기를 해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상상을 한다.
뜬다, 뜬다, 뜬다!!!
바람이 거세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하늘을 가른다.
창밖의 풍경이 사선으로 멀어지다가 어느새 발밑으로 사라진다.
"엄마, 우리가 구름 위로 올라왔어!"
"구름 위에도 하늘이 있어!"
요란한 소음, 압력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이 줄어드니 아이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좌린이 이륙 전에 찌그러뜨린 생수병이 다시 부풀어 오른 것을 보여주었다. 뚜껑을 여니 병 속에 들어 있던 공기가 터져 나오며 픽 소리가 났다.
높이 올라올수록 공기가 누르는 힘이 적어진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니까 몸도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마음은 솜털처럼 가벼워 구름보다 더 높은 하늘 위를 둥둥 떠다녔다.
땅으로부터 멀리 떨어졌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했지만, 일상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경계를 넘어서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곳, 우리를 알지 못하는 그들과 마주할 것이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떠올리니 내가 마치 딴사람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발밑으로 사라진 풍경과 함께 저 아래에 두고 온 것들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꼬박 칠 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아온 나, 매일매일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일상에 안녕을 고한다.
나중에 돌아와서 보면 별반 달라진 것이 없을지라도 떠날 땐 항상 그렇다.
나와 다른 나를 꿈꾼다.
뭔가 달라질 거라는 기대를 품는다.
그래서 이토록 마음이 설레는 것이다.
# 서울, 겨울 탈출
새벽 네 시 반, 알람 소리에 일어나 아이들을 깨웠다.
영하 6도. 본격적인 겨울 추위가 다가오고 있었다. 올겨울은 어느 해보다 더 추울 거라는 이야기가 경고음처럼 곳곳에서 들려왔다.
서울의 겨울로부터 탈출하는구나!
반 팔 티셔츠와 얇은 바지 위에 티셔츠와 바지를 겹겹이 껴입으며 쿠알라룸푸르 공항에 내려 허물 벗듯이 하나씩 벗어 버릴 상상을 하니 배시시 웃음이 났다.
택시를 불러 탔는데 국제 운전면허를 가방에 넣었는지, 넣지 않았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택시를 세워 놓고 가방을 뒤지고 집에 오르내리다 보니 다섯 시 사십 분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시간이 빠듯해져서 잠실에 가서 리무진을 갈아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공항까지 택시로 갔다.
"해람아, 공항이 어떤 곳인지 알아?"
"응, 알아. 놀이터야."
2년 전에 필리핀에 갈 때, 그리고 바로 작년에 제주도 갈 때, 해람이와 비행기를 타 보았다. 혹시 그걸 기억하는지, 다섯 살 꼬마는 이전 여행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궁금해서 물었는데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비행기 타 본 거 생각나? 어땠어? 다음 질문을 준비하고 있다가 어이없는 일격에 말문이 막혔다. 차라리 모른다고 하면 친절하게 설명이라도 해주지.
저가 항공이라서 그런지 탑승구가 멀었다. 출국 심사대를 통과한 다음 셔틀 트레인 타고, 무빙워크로도 오래 걸었다.
"비싼 국적기는 바로 코앞에 탑승구가 있더만..."멀다고 투덜거리는 것은 나.
"택시 타고, 기차 타고, 전동 길 타고, 비행기 타러 가네!"
아이들은 다양한 탈것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놀이동산에 온 것처럼 신이 났다.
공항이 어떤 곳인지, 그리고 예전 여행에 대해 무얼 기억하는지, 묻는 내 질문은 참 어리석었다. 아이들 머릿속에 뭘 자꾸 쑤셔 넣으려 하고 얼마나 알고 있는가 확인하고 싶어하는 나의 얄팍한 속셈이 멋쩍었다. 그에 비하면 해람이의 대답은 얼마나 현명한가! 어디든 제 놀이터로 삼고 놀이로 세상을 만난다니, 얼마나 멋진가 말이다.
낯선 놀이터에서 그러듯이 해람이는 내 손을 힘주어 잡았다. 눈을 크게 뜨고 뭐 하나 놓치지 않으려 두리번거렸다.
"엄마, 저기 봐! 비행기! 저기, 저기도!!!"
하도 저기 봐를 연발하셔서 일일이 같이 봐주고 대꾸하는 것이 힘들 정도였다. 난간에 그려진 조그만 비행기 문양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해람이보다 두 살 위인 아루는 훨씬 여유가 있었다. 표지판을 읽고 우리가 찾아가는 길을 확인하고 가볍게 총총 뛰어다녔다.
여행 모드의 좌린은 어딜 가나 외국 사람으로 오해를 받았다.지난달부터 기르기 시작한 콧수염에 십 년 전 인도에서 산 스카프를 두르고 새로 마련한 완소 썬글라스를 쓰고 있으니 한국의 평범한 직장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항공사 직원, 식당 직원들이 영어로 인사하고 묻는 말도 영어로 했다. 좌린이 우리말로 답을 하면 당황하기도 했다.
수염을 잘 깎지 않아서인지 여행 다닐 때 일본 사람으로 자주 오해를 받는다. 니혼진자나이, 강꼬꾸징데쓰. 좌린이 처음 배운 일본어는 ‘일본사람 아니고 한국사람입니다.’였다.
자신이 다른 나라 사람으로 보이는 것을 즐길 때도 있다. 중국인 무리를 보면 참지 못하고 다가가 쭝궈렌마? 중국 사람입니까? 하고 묻는다. 과거 연변에서 한 달 배운 중국어 실력은 딱 그 정도인데 사람들은 좌린이 중국사람인 줄 알고 빠른 속도로 거침없이 중국말을 쏟아낸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듣는 척하다가 상대방이 말을 멈추고 반응을 기다리면 비로소 손사래 치며 한궈렌, 한국 사람임을 밝힌다.
"네가 중국사람인줄 알았어!"좌린이 듣고 싶은 말은 바로 그것이다.
"거봐, 내 중국어 발음은 원어민 수준이라니까!" 쭝궈렌마? 한궈렌! 겨우 두 단어만으로 엄청난 자뻑.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택배 회사에 들러 겨울옷들을 시댁으로 부치고 부재자 투표를 하고 인증샷을 남겼다.
좌린과 내가 서로 찍고 아루와 해람이가 우리 둘을 찍었다.
비행기에서의 여섯 시간 반. 아이들도 지루해서 몸을 꼬았다.
‘얼마나 더 가야 해?’ 테이프를 반복으로 틀어놓은 것처럼 되풀이되는 아이들의 질문에 답을 해주다 보면 시간이 더 더디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러다 해람이는 잠이 들었고 아루도 제힘으로 시곗바늘을 빨리 돌릴 수 없음을 깨달았는지 소일거리를 찾았다. 기내식으로 나온 키즈팩에 종이접기 책과 색종이가 들어 있었다. 펭귄 가족을 만들고 나비를 만들고 고래를 만들었다. 가방에서 종합장을 꺼내 공주님도 여러 명 그렸다.
미리 예약한 두 번의 기내식을 먹었다. 저가 항공이라 기내의 모든 서비스는 따로 돈을 내야 한다. 물 한 병, 커피 한 잔도. 비행기를 타면 공짜 맥주나 와인을 마셔줘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어 아쉬웠다. 맥주 한 캔 얼마나 한다고, 사 먹을까 싶기도 했지만 애써 싼 비행기표를 끊은 취지를 살리려면 참아야 했다.
영화를 보고 싶으면 갤럭시 탭이나 아이패드를 빌려야 한다. 비행기에 모니터가 아예 없어서 우리가 어디쯤 왔는지 볼 수도 없었다. 어디쯤 왔는지 꼭 알고 싶은 것보다 멍하게 시선 둘 곳이 없어 답답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좌린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간밤에 각종 게임을 받아 왔단다.
나는 도 닦는 심정으로 여행 안내서를 펼쳤다. 영어로 쓰여진!
#쿠알라룸푸 도착, 35도의 차이
공항에 내리자마자 심카드를 사서 스마트폰에 바꿔 끼웠다. 순식간에 말레이시아 국내 번호가 생겼다. 시험 삼아 조금 떨어져 둘이 통화를 해보았다.
나는 스마트폰을 가져오는 것에 반대했었다.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능에 익숙하지도 않고, 잃어버릴까봐 신경 써야 하는 물건이 하나 더 느는 게 싫었다.
무릇 여행이란 아날로그적이어야 한다고, 간단한 클릭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직접 만나 부딪쳐 봐야 한다고, 기다리고 참는 과정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그것이 진정한 여행이라고, 여행 좀 해본 사람의 허세를 부리고 싶었다.
그러나 새로 사는 것도 아니고, 있는 물건 활용하는 건데 뭘 그러냐는 좌린의 설득, 그리고 아이 하나씩 떠맡아 따로 행동할 일이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지못해 가져왔다.
좌린은 벌써 이런저런 어플을 돌려보는데 나는 그냥 가방 안쪽에 쑥 밀어 넣었다. 원래 하던 대로 공항에 비치된 종이 지도를 챙기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 쿠알라룸푸르 시내로 가는 버스표를 샀다.
짐을 찾아 공항 밖으로 나왔다. 이제 짐수레를 세워두고 느긋하게 앉아 이 도시의 공기를 음미할 차례였다.
후끈한 열기, 영하의 날씨로부터 탈출을 감행한 자가 꿈꾸던 그것을 온몸으로 느껴야 할 순간, 추위에 움츠리고, 불편한 비행기 좌석에 구겨졌던 몸을 쫙 펴고 성공적으로 떠나왔음을 자축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여행이 언제 내 뜻대로, 계획대로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적이 있었나.
가까운 곳에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볼 겨를도 없이 두 아이를 끌고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기다렸다는 듯 비가 쏟아졌다. 낮은 지대의 도로에서는 차들이 보트처럼 보일 정도로 짧은 시간에 엄청난 양의 비가 내렸다.
냉방을 심하게 한다더니, 정말, 버스 안이 추웠다. 반 팔 차림으로 완벽하게 변신을 하지 못한 채 버스에 탔는데 오히려 점퍼를 더 꺼내 입어야 할 정도였다.
"오늘 낮 최고 기온, 29도!"
좌린이 날씨 어플을 내려받아 바깥 기온을 알려주었다.
영하 6도에서 영상 29도, 35도의 차이! 극명한 기온의 차이를 몸으로 느끼지 못해 아쉽지만, 대신 숫자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창밖의 이국적인 풍경이 마음을 달래주었다. 도심으로 들어서니 고층 빌딩 틈에서 중국식 기와지붕, 이슬람 형식의 돔 지붕, 그리고 힌두 사원이 눈에 띄었다. 히죽히죽 웃음을 되찾았다.
버스는 우리를 쿠알라룸푸르 중앙역 (KL sentral)에 내려놓았다. 택시 타라는 호객꾼들을 물리치고 모노레일 역까지 걸었다. 이름은 똑같이 KL sentral 이지만 모노레일 역은 따로 떨어져 있는데, 그런 줄 모르고 한참을 헤맸다.
우리의 목적지는 라자출란(Raja Chulan)역, 중앙역에서 여섯 번째 정거장이다. 으리으리한 이스타나 호텔, 파크로얄 호텔을 지나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니 우리의 ‘둥지’가 나타났다. 이름이 소박하다. 우리가 묵을 게스트 하우스, ‘The nest'(둥지).
방을 정하고 짐을 풀고 나니, 이미 해가 저물었다.
서울 집에서 여기, 쿠알라룸푸르 도심의 게스트하우스까지 꼬박 열여섯 시간이 걸렸다.
택시를 탈까, 버스를 탈까?
택시를 탈까, 모노레일을 탈까?
무거운 가방을 메고 지고 도시를 활보하는 것이 여행자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야 당연히 버스와 모노레일을 타고 싶지만, 아이들이 괜찮을까 싶어 물었는데 순순히 우리와 뜻을 같이해 주었다. 긴장해서 그런지, 부모 사정 봐서 그런지, 아이들이 안아달라거나 힘들다고 징징거리지 않았다. 신통했다.
공항버스와 모노레일에서 해람이는 창문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두 눈 부릅뜨고 뚫어져라, 창밖을 응시했다.
"엄마, 말레이시아에서는 비가 이렇게 옆으로 내린다."
"해람아, 그건... 왜 그렇게 보이냐면..."
"나, 알아. 그림책에서도 그러잖아, 눈이 이렇게 옆으로 쭉쭉 오잖아. 그거랑 같은 거야."
달리는 버스 유리창에서 빗줄기가 사선으로 흘러내리는 건 어디나 똑같다고 알려주고, 그리고 왜 그렇게 보이는지 설명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이곳이 얼마나 낯설면 창문에 흘러내리는 빗줄기마저 다르게 보일까? 뭔가 다르다고 느끼고, 그것이 제가 아는 무엇과 같은지 생각을 해본 것이 대견했다.
모노레일에서는 이런 말도 했다.
"엄마, 세상에는 차가 백 개도 넘는 것 같아."
도심을 통과하는 모노레일 아래에 차들이 도로를 꽉 메우고 있었다. 퇴근 시간인지 길이 엄청나게 막혔다.
“해람이가 수를 어디까지 셀 수 있을까? 우리 같이 몇 대인지 세어 볼래?” 예전의, 서울에서의 나라면 그랬겠지. 수를 가르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하지만, 역시 그만두었다. 세상에 차가 백 개도 넘는다는 말이 왠지 시적으로 느껴졌다. 와~ 차 많다, 라는 말보다 몇백 배.
다섯 살 해람이에게 이번 여행이 얼마나 낯설고 새로운 경험이 될지,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일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일일이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아는 지식을 아이에게 전해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번 여행에서만큼은 친절한 엄마의 자상한 설명 따위는 그만두자. 아이들 스스로 보고 느끼고 제멋대로 생각하게 두고 싶다.
#첫날밤, 첫 식사
저녁을 어디서 먹을까? 뭘 먹지? 태국음식? 인도음식? 말레이음식?
숙소 근처에 나란히 서 있는 식당들 앞에서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우선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곳부터 섭렵해 보기로 했다. 뷔페처럼 여러 가지 음식이 나란히 진열된 곳에서 내키는 대로 담아 봤다. 아이들은 제 눈에 익숙한 튀김을 고르고 좌린은 역시나 걸쭉한 커리에 밥을 주문했다. 나는 나시라막(Nasi Lemak)!
코코넛 밥에 땅콩과 멸치 튀김을 넣고 매콤한 소스에 비벼 먹는 것을 나시라막(Nasi Lemak)이라고 하는데 말레이시아의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다. 나시(Nasi)는 쌀, 라막(Lemak)은 지방이란 뜻. 밥에 지방질이 많아서가 아니라 코코넛 밀크에 담근 쌀로 밥을 짓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매콤하면서 감칠 맛 나는 소스가 입에 잘 맞았다. 맛있었다.
식당 밖 길가 자리에는 사람들이 모여서 축구 경기를 보고 있었다. 무슨 무슨 컵 준결승전, 상대 팀이 어디였다는데, 좌린이 열심히 검색해서 알려줬지만 듣자마자 금방 까먹었다.
어쨌든 "말레이시아 이겨라!!"아이들과 서서 같이 말레이시아를 응원했다.
숙소로 들어오는 길에 가게에 들러 과일을 샀다. 나는 꿈에 그리던 망고스틴에 눈이 갔지만, 아이들이 바나나와 파인애플을 골랐다. 새로운 과일을 시도해보자고 하려다가 참았다. 익숙한 무엇을 발견하는 기쁨도 있을 테고, 무조건 새로운 것을 찾는 것보다 제게 익숙한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지내면서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도 조금씩 자라나겠지.
서울에서는 방부제 때문에 즐겨 먹을 수 없었던 바나나와 파인애플, 이것부터 실컷 먹어 보자.
몸은 되게 피곤한데 쉽게 잠이 오진 않을 것 같다.
쿠알라룸푸르 최대의 번화가 부킷빈땅(Bukit Bintang)의 뒷골목, 이름처럼 소박한 ‘둥지’에서 맞는 첫날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