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전라북도 정읍시 백암초. 도서관 한쪽에 전교생 52명이 왁자지껄 모여 있다. 교사들은 주변에 앉거나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6학년 오현민군이 말했다. “6회 다모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칭찬 소나기’를 진행하겠습니다. 지난주 주인공 권가윤 어린이 나와주세요.”
아이들은 저마다 손을 들고 칭찬 주인공인 권양의 행동을 칭찬했다. “저한테 초콜릿을 나눠 줬어요” “다른 애가 저를 괴롭힐 때 도와줬어요” “항상 옷을 예쁘게 입고 와요” 등등. 일주일간 자신이 권양과 지내며 느낀 점을 전교생과 나눴다.
이후 일촌별 협의시간에는 지난 봄나들이 결과를 발표했다. 이 학교는 학년별로 한 명씩 뽑아 한 팀을 꾸려 프로젝트 활동을 한다. 아이들은 자전거 타기부터 영화 관람, 돼지농장 방문 같은 활동을 이야기했다. 이번 나들이는 한 달여 준비기간을 거쳐 나온 것이다. 학생들은 1인당 1만5천원의 예산과 정해진 시간 안에서 직접 활동을 계획하고 진행했다. 6학년이 ‘촌장’을 맡고 각자 예산, 섭외, 간식 등 할 일을 나눠 맡았다.
자기주도적 프로젝트 수업 등
혁신교육 취지 공감 학교 늘어
학생 스스로 몰입·도전 강조
전북교육청 ‘참학력’ 개념 눈길
지필식 평가 방식 한계 벗어난
‘성장평가제’ 도입이 큰 차별점
혁신학교에서 진일보한 ‘참학력학교’
백암초는 올해 ‘참학력학교’로 지정됐다. 전북교육청은 2012년 ‘참학력’이라는 학력관을 발표하고 초등학교 35곳, 중학교 30곳, 고등학교 51곳을 참학력학교로 지정해 운영 중이다. 참학력이란 ‘학생 스스로 배움에 도전하고 몰입하는 자기주도적 학습능력’을 뜻한다. 백암초 학생들이 매주 월요일 여는 다모임, 자기주도적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 활동 등은 참학력학교의 다양한 모습 가운데 하나다. 이 학교 이혜란 교사는 “우리 학교의 경우 무학년제로 프로젝트 활동을 한다”며 “교사들이 머리를 맞대 교육과정을 재구성했다”고 설명했다.
교육청 쪽은 참학력의 세부항목으로 ‘창의적 문제해결 능력’ ‘자기관리 능력’ ‘소통 및 참여 능력’ ‘생태 및 문화 감수성’ 등을 설정해놓고 학생들이 이런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는 ‘혁신교육’이 등장하면서 혁신학교를 포함한 일반 학교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참학력은 혁신교육의 연장선상에 있되, 여기서 교육 내용을 좀 더 공고히 하고 ‘평가제도’의 혁신에 방점을 찍는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방식이다. 혁신교육을 하는 학교조차 체험 위주의 활동과 프로젝트 수업을 하면서도 평가는 여전히 지필식인 경우가 많은데 참학력학교는 이런 평가의 한계점을 극복하고 있다.
백암초도 특별한 평가 방식을 시도했다. 프로젝트 활동을 하고 지필고사 대신 수시평가를 하는 방식이다. 교사들은 교육과정을 재구성하면서 평가 기준과 평가서도 다시 만들었다. 학부모한테 성적표 대신 아이들의 성장 이력을 담은 평가통지서를 주기적으로 보내고 소통하려는 뜻이다.
다모임 시간과 프로젝트 활동도 평가에 포함된다. 친구에 대해 칭찬하고 파워포인트 자료를 만들거나 글을 써서 의견을 발표하는 것, 대중교통을 이용해 나들이를 가서 돼지를 관찰하고 영화를 보는 것 모두 도덕, 국어, 사회 등 교과와 연계해 수행평가를 한다. 이 교사는 “책상 앞에서 시험 보는 게 아니다 보니 아이들은 즐기고 협력하면서 진행하는 활동이 평가인 줄 모르는 경우도 있다. 점수를 잘 받고,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활동 자체에 더 몰입하고 좋아한다”고 말했다.
배움 과정에 주목한 평가 도입
교육청 쪽은 참학력 신장 차원에서 올해 ‘초등 성장평가제’를 도입했다. 참학력을 제대로 키운다는 것은 아이들의 배움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학생 개개인이 얼마나 성장하는지를 보는 것과 연결된다. 성장평가제는 이런 의미로 “너 이거 알아?”가 아니라 “너 이거 할 수 있어?”라는 질문을 던진다. 단편적인 교과 지식을 묻는 게 아니라 과정 중심으로 다양한 사고와 문제해결력을 기르고, 삶에 대한 가치를 알게 하는 데 초점을 둔다. 이를 위해 교과학습 능력뿐 아니라 학생의 인성이나 태도 등 비인지적 능력까지 평가한다.
“교육 방식과 내용에 따라 평가가 달라져야 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서술식이나 수시평가를 하면 품이 많이 들고 객관성을 단순히 ‘공정성’으로만 따지는 경우가 많다. 교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모를 때도 있고, 알아도 혼자서 밀고 나가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다양한 평가 방식을 시도 중인 교사들의 말이다.
학생도 마찬가지다. 평가를 전제로, 점수를 얻기 위해 마지못해 할 경우 활동이 부담스럽고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다. 결국 평가 자체가 아이들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학부모 의견 담은 수업노트도
“수행평가 결과, ‘사회’ 영역, 방위, 기호 등 지도를 구성하는 요소로 마을을 그림지도로 나타낼 수 있음. 모둠 활동 시 다른 친구들과 협력하는 자세 필요.
‘수학’ 영역. 직사각형과 정사각형을 분류하고 각각의 특징을 활용해 무늬를 꾸밀 수 있음. 문제를 푸는 데 신중한 자세 필요.
종합의견. 적극적인 성격이 장점과 단점으로 나타날 때가 있어요.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간섭을 하거나 괜한 장난이 시비로 느껴져 다툼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습니다. (…) 활동적인 성격에 자신의 의견은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반면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수연이와 이 문제를 자주 이야기하며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백암초 3학년 수연(가명)이의 올해 1분기 평가통지표 내용이다. 수행평가는 ‘교과명, 영역, 성취기준(주제), 성취수준(평가결과)’으로 나눠 자세히 적혀 있다. 프로젝트 학습과 과목별 수시평가 내용을 포함해 아이의 전반적인 행동이나 성격에 대한 기록이 A4용지 앞뒤 한 장에 빼곡하다.
“프로젝트 수업을 하고 활동이 다양해지면서 평가 방식도 바꿔왔다. 지필평가 대신 과정 중심으로 서술식 평가를 하고 학부모에게 매주 학생들의 활동지를 포트폴리오에 담아 보낸다. ‘함께 나누는 수업노트’를 만들어 아이들의 활동 내용과 평가를 써서 가정에 보내면 학부모가 피드백을 해서 교사에게 다시 보내는 식으로 소통하기도 한다.”
나미애 교사의 말이다. 평가 방식을 바꾼 뒤 아이 한 명 한 명 좀더 살펴보게 됐다. 예전에는 학부모나 학생이 생활기록부 내용에 민감해서 눈치가 보였던 탓에 좋은 내용 위주로 썼다. 지금은 자체적으로 만든 평가서를 부모와 수시로 주고받기 때문에 아이의 단점이나 학습 부진에 대해 더 솔직하게 쓸 수 있다. 학부모 입장에서도 자기 아이가 뭐에 관심 있고, 어떤 부분이 더딘지 제대로 아는 기회가 된다.
세 아이를 백암초에 보내는 김미애씨는 “1년에 한 번 성적표만 받았을 때는 아이 수준이나 관심사를 정확히 몰랐다. 수시평가를 하며 교과 성적뿐 아니라 활동지까지 보내주니 아이가 로봇과학 동아리를 하면서 수학에 관심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스스럼없이 평가해주니 집에서와는 다른 아이의 모습도 알게 되고 교사와 상담할 때 대화하기도 오히려 편하다”고 했다.
혁신교육을 해오고 있는 교사들은 “어떤 교육이나 평가 방식이 좋다고 모든 학교에서 일괄적으로 한꺼번에 할 수는 없다. 학교 상황에 맞춰, 구성원들 간의 협의를 해가면서 단계적으로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나 교사는 “성장평가제를 일반화하려면 ‘이거 좋으니까 해라’는 식으로는 힘들다. 구체적인 학교 사례를 들어 방법론을 알려줘야 한다”며 “새로운 활동이나 평가가 초등과정 이후 단절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분위기가 중등에까지 이어지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사는 “우리는 전부터 여러 방식을 시도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참학력 교육이나 성장평가제가 사실 새롭지 않다. 또 성장평가제가 ‘소규모 학교’라, ‘초등학교’라 가능하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학교 상황이나 구성원의 인식에 따라 차이가 난다. 중요한 것은 정규 수업이나 활동 중에 자연스레 평가가 이루어지고, 아이마다 다른 성장 속도를 관심 있게 지켜보려는 교사의 의지”라고 말했다.
정읍/글·사진 최화진 <함께하는 교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