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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이 어디일까, 극락사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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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에 아루가 늦게까지 뭔가를 하고 있어서 그만 자라고 잔소리를 하다가 내가 먼저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여권과 지갑을 만들어 놓았다.
엄마, 엄마 가방에는 뭐가 들어 있어?
나 좀 볼래!
요즘 아루가 내 가방에 부쩍 관심을 보였다. 여행 떠나기 전부터 꽤 오랫동안, 밖에 나갈 때 항상 메고 다니던 거라 새로울 게 없는데 갑자기 관심을 보이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퍼를 열고 손을 쓱 집어넣거나 가방을 뒤지려고 해서 당황스러웠다.
사진기랑 렌즈가 들어 있잖아!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누군가의 가방에 (그게 엄마, 아빠 것이라 해도) 허락 없이 손을 넣어서는 안 된다고 설교를 했다.
아루가 만들어 놓은 여권과 지갑을 보니, 아루가 궁금하던 것이, 아루의 관심사가 내가 늘 가지고 다니던 ‘사진기 가방’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 있는 새로운 물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처럼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진기와 렌즈, 사진기 배터리, 메모리 칩, 손전화기와 배터리 같은 것들 말고. 내가 ATM에서 돈을 찾을 때, 처음 도착한 숙소의 리셉션에서 가방 안쪽에 손을 넣어 더듬거리며 찾아 꺼내었다가 다시 밀어 넣는 것들, 잃어버릴까 애지중지하고 누구에게 알려질까 봐 소곤거리는, 비밀스럽게 다루어지는 물건들의 정체, 여권, 현금 카드, 비상금 등이 들어 있는 비밀 주머니.
여권에 사진 붙이고 영어로 제 이름을 쓰고, 지갑에 종이돈 넣는 칸막이와 동전 주머니까지 달아 놓은 것이 깜찍해서 미소를 지었다. 한국에서 주로 신용카드를 쓰다가 여기 와서 현금을 주고받는 것도 아이에겐 색다르게 느껴졌으리라. 게다가 우리와 다르게 생긴 종이돈과 동전이 얼마나 신기했을까!
아루가 만든 지갑에 1링깃짜리 종이돈과 동전을 몇 개 채워주고 내 ‘비밀 지갑’으로 쓰던 주머니를 아루가 쓰게 해주었다. 대학 때 네팔에서 사온 조그만 주머니 가방, 한 때 배낭여행자, 자유로운 영혼의 표식처럼 느꼈던 그것을 매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촉촉해졌다. 신이 나서 제 사진기, 제가 만든 여권과 지갑 등을 챙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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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 페낭 힐에 갈 때와 비슷하게 섬 중심부로 향하는 201번 버스를 탔다. 조지타운 외곽을 빙빙 돌아서 조금 어지러웠다. 해람이는 좌린에게 거의 매달려 갔다. 조금 불안했는데 다행히 멀미는 하지 않았다.
오늘의 행선지는 Kek Lok Si temple. 말레이시아 게임을 하면서 ‘이걸 어떻게 읽어야 돼?’ ‘켁록시’? 발음이 부자연스러워 불편했는데 한자를 보니 ‘극락사(極樂寺)’다. 어트랙션 Attraction 카드에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불교 사원 중의 하나’라고 소개되어 있다. 게임 카드에 나온 곳이라 별 고민 없이 그냥 가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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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려 땡볕에 구불구불 언덕을 올랐다. 인도가 없는 좁은 찻길에 차들이 많지는 않았는데 너무 쌩쌩 달려서 차 한 대 지나갈 때마다 아찔했다. 우리처럼 걸어 올라가는 사람이 없어 조금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보행자 길은 따로 있었다.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 흔히 ‘절’에 대해 떠올리는 고풍스럽고 오래된 느낌과 거리가 있었다. ‘신식인데!’ 콘크리트 건물, 가우디를 떠올리게 하는 타일조각 장식을 보며 좌린이 말했다.
여러 개의 건물에 문이 여러 개로 나 있어 우리처럼 방향 감각이 부족한 사람들은 길을 잃기 쉬웠다.
곳곳에 부처상과 향로가 있었는데 어떤 의미인지,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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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무슨 소원을 비는 걸까,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들이 절을 하고 향을 피우고 한 곳에 초를 켜놓은 모습을 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경건한 불당에서 불경스러운 생각이지만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바람을 말풍선으로 보여주면 엄청나게 시끄러울 거라는, 신이 있어 가엾은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한다면 엄청나게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자들의 궁극의 바람은 극락왕생이라던데, 극락정토와 지옥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몸과 마음을 갈고 닦고 덕을 많이 쌓으면? 그렇다면 극락에 갈 수 있는 ‘합격선’은 한평생 살면서 쌓아온 선행과 정신 총량의 평균으로 정해지나, 아니면 마지막 숨을 거둘 때의 영혼의 상태로? ‘극락’, 지극히 편안하여 아무 걱정이 없는 상태란 어떤 것일까?
아이들이 소원 트리에 리본 달기를 해보자고 해서 약간의 돈으로 시주를 하고 리본을 골랐다. 알록달록한 리본에 여러 가지 한자와 영어로 소원이 적혀 있었는데 가족의 건강, 재산, 학업 성취 등은 너무 세속적인 것 같고 그렇다고 ‘세계 평화’를 고르자니 너무 거창한 것 같아서 조금 애매하게 ‘조화롭게 함께 살기’, 영어로 living together harmoniously 라고 적힌 것을 골랐다. 한자를 잘 몰라서 정확한 뜻은 모르겠지만. 아루가 우리 네 식구 이름을 써서 소원 트리에 걸었는데 해람이도 하고 싶다고 해서 하나 더 골랐다. 이번에는 ‘만사형통’! 문득 불교 신자인 엄마 생각이 나서, 절에 가서 자식들의 건강과 번영을 빌어 주시는, 지금도 먼 길 떠난 우리 네 식구를 가장 걱정하고 계실 엄마 생각이 떠올라서 내가 부모님 이름을 쓰고 해람이가 그림을 그렸다. 자동차와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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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게임 카드에 있는 흰 탑에 올랐다.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계단을 오르는 것이 조금 힘들었지만, 막상 올라오니 바람이 시원하고 전망도 좋았다. 가슴이 탁 트이는 듯 했다. 지상에서 30미터, 7층 높이인데 아이들이 군소리 없이 잘 올라왔다. 신기할 정도로 불평 한마디 없이! 그리고 뭐랄까 아이들에게서 평소보다 차분하고 평안한 기운이 느껴졌다. 고행까지는 아니라도 힘들게 탑을 오르면서 마음이 안정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평온함이 놀라워서 조그만 탑을 오르면서도 이런 평온함을 얻을 수 있는데, 부처님처럼 열심히 수행하면 정말로 지극히 편안한 정신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원한 전망과 평온한 마음을 즐기고 넷이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남기고 내려왔다. 이번에는 계단의 폭이 점점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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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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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연못에서 거북이를 보았다.
엄마, 쟤는 파인애플 거북이야, 빨리 찍어!
해람이는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먼저 발견해내는 재주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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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가는 길, 보행자 통로에는 양쪽으로 기념품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내가 사진을 찍는 사이, 아이들은 기념품 구경을 했다. 사진을 다 찍고 아이들이 무엇에 관심을 갖는지, 어떤 물건을 좋아하는지 궁금해서 조금 지켜보았다. 아루는 분홍색, ‘공주’의 범주에 드는 물건을 만지작거리고 해람이는 역시나 동물에 관심이 많았다.
“누나, 이거 재밌지?” 해람이가 3D로 보이는 동물 그림을 들고 아루에게 말했다.
“근데, 물건을 살 때는 잘 생각해야 해. 재밌어 보여서 샀는데 다시 보니 재미가 없어, 그러면 돈만 뺏기는 거잖아.”
이번엔 아루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 장난감이 오늘 재밌고 내일도 재미있을지, 한 달 뒤에도 가지고 놀지, 생각해야 돼.”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빙그레 웃음이 났다. 아이들이 물건을 덥석 사달라 하지 않고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참 대견했다. 너무 흐뭇해서, “어머, 너희 참 기특하다, 그러니 오늘은 특별히 뭘 좀 사줄게. 마음껏 골라봐~.” 라고 할 뻔 했다.
아이들이 기념품 가게에 오래 머물러서, 사고 싶은 물건이 있는지 물어보려다가 참았다. 아이들 스스로 ‘돈을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을, ‘오늘, 내일도, 한 달 뒤까지 재미있게 가지고 놀 수 있는’ 물건을 찾으면 내게 말씀하시겠지!
아이들이 상품으로 손쉽게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데 길들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가능하면 제 손으로 만들고 짓고, 부족한 부분은 무한한 상상력으로 채워나가길! 하지만, 지나치게 막으면 그 뜻이 아무리 좋아도 그 자체로 ‘억압’이 될 수 있음에도 생각이 미친다. 무조건 소비는 나쁘다, 장난감 사지 마라, 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고백하건대 나도 마음에 드는 기념품이 있을까, 눈으로 열심히 고르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말레이시아, 페낭에서만 살 수 있을 것 같은 색다른 물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어느 여행지를 가도 그곳만의 특별한 수공품은 만나기 힘들어진 것 같다. 중국의 공장에서 만들어져 여행지 이름과 로고만 다른 물건들, 얼마 전에 다녀온 캄보디아, 베트남에서 보았고 종로, 인사동에 나가도 있을 법한 물건들이 점령한 기념품 가게, 조금은 씁쓸했다.
그래도, 금방 부서질 조잡한 플라스틱 장난감이라도 아이들이 이렇게 ‘숙고’해서 고른다면 기꺼이 사주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도 나처럼 인상적인 선물을 찾지 못한 것 같다. 끝내 아무도 ‘사고 싶다.’, ‘사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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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버스는 기다려야 한다, 오~래.
버스 정류장 표지판이 예뻐서, 한낮의 햇빛에 벌겋게 ‘익은’ 두 아이가 그림을 그리며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이 예뻐서 찰칵!
함께 기다리는 여행자들이 여럿 있었는데 기다리는 중에 지나가는 밴(van) 한 대가 서더니 조지타운으로 가는 길이라고 해서 몇 명은 가격을 흥정해서 그 밴을 타고 갔다. 우리는 꿋꿋이 기다려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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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으러 차이나타운으로 걸어가다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길거리 식당을 발견했다. 낡은 플라스틱 테이블에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풍경에 좌린은 몹시 흥분했다. 우아하고 고상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에선 무덤덤하지만 이런 길거리 식당에선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하고 감동하는 이 남자가 바로 내 남편이다! 하루 이틀 아니고 십수 년을 함께 했으니 남편의 ‘취향’이 그리 놀랍거나 실망스럽지 않고 조금 맞장구를 쳐 줄 ‘센스’도 있다. ‘그래, 허름해도 이런 곳이야말로 진정한 맛집일 거야.’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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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람이는 ‘사떼’(꼬치구이를 이르는 말레이어, 인도네시아에서도 이렇게 부른다.)
나는 ‘락사’(생선을 우려낸, 우려낸 정도가 아니라 믹서에 갈은 듯한, 국물에 맵고 시큼한 쌀국수. 독특한 향신료를 넣는데 역하지 않다. 대체로 한국 사람 입맛에 잘 맞을 듯. 좌린은 ‘추어탕’과 흡사하다고 주장)
아루는 쌀국수를 먹었고
좌린은 이 식당의 인기 메뉴라며 곰국 같은 걸 먹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어떤 동물(돼지나 소 겠지)의 뇌를 끓인 거였다고.

오늘은 페낭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내일 밤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믈라카로 갈 것이다.
오늘 하루 이렇게 네 식구 잘 먹고 잘 놀았으니, 나날이 소중히 여기며 살면 그걸로 됐지, 극락이 어디일까 헤매 일 필요 있나, 배부르고 등 따수니 (아니, 숙소의 에어컨 바람에 땀 식히며) 드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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