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교시 페미니즘
여성.페미니즘/게티이미지뱅크
진로수업의 일환으로 나의 롤모델을 정해보자는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이 조사해 온 롤모델의 성비는 9 대 1에 가까웠다. 물론 남성 위인이 9였다. 생각해보면 나도 여성 위인에 대한 수업을 한 적은 있어도 적극적으로 본받아야 한다며 권한 기억은 없다.
유관순 열사의 경우 이미지가 ‘영웅’이라기보다 ‘가련한 희생자’라는 이유가 컸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재판 현장에서 재판장을 향해 나는 잘못한 거 없다고 호통을 쳤다는 일화가 기억이 나는데 유관순은 시신이 너무 처참해서 알아볼 수 없었다는 일화가 기억난다. 아이들에게 본받으라고 하자니 뭔가 저주를 거는 것 같다는 기분마저 들 지경이다. 신사임당의 경우는 어떤가? 이른바 ‘현모양처’가 통상적인 이미지라 여학생에게 롤모델로 제시하자니 성역할을 강화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남학생에게는 공감이 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말랄라 유사프자이(여성이 교육받을 권리를 주장했다가 탈레반의 총에 맞았던 파키스탄 출신 소녀)는 또래의 여성 위인이라는 점에서 아이들이 이입하기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업 소감에서 아이들 대부분이 말랄라를 ‘기특하다’, ‘총을 맞은 것이 가엾다’고 생각할 뿐 ‘존경스럽고 대단하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수업 때 쓴 영상 자료가 남성 영웅 일화를 담은 것과 달리 감성적인 분위기의 음악에 ‘소녀의 몸으로’ 따위 내레이션으로 이루어져 있는 게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다음날 학생들을 대상으로 솔직하게 답변해줄 것을 신신당부하고 간단한 실험을 했다. 비슷한 업적을 가진 남성 위인과 여성 위인을 제시하고 둘 가운데 어떤 사람을 나의 롤모델로 삼고 싶은지 이유와 함께 물어봤다. 대부분이 남성 위인을 선택했다. “그냥 골랐다”, “남자 쪽이 더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 같다”, “여자는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다”, 특히 “여자 인물은 여자만을 위한 일을 해서 별로다”, “학교 다니는 남학생은 위인이 아닌데 여자는 학교만 가도 위인이 되는 게 좀 차별 같다”는 말이 속상했다.
이후 여성 위인에 대한 수업을 할 때는 학생들의 이입을 돕기 위해 디딤돌을 놓는다. 남학생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치마를 입고 학교에 오게 된 상황을 종종 제시한다. 이 말을 꺼내는 순간부터 웃고 난리가 난다. 하지만 우리나라 법에 남자가 치마를 입으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다. 전국 초등학교 규칙이나 학급 규칙에도 이런 것을 정해놓은 곳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치마를 입고 싶다고 해서, 남학생이 치마를 입고 등교하는 것이 쉬운 일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적 편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남자 의사가 잔뜩 있는 가운데 등장한 최초의 여성 의사, 학교에 다니는 남학생이 잔뜩 있는 가운데 등장한 최초의 여학생이 존경받아 마땅한 이유다.
수업 때마다 여성을 위해서만 일한 사람을 남학생들에게도 존경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공감을 얻을 수 있는가란 의문을 떠올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감을 얻을 수 있고, 공감을 얻게 해야 마땅하다. 인류의 절반을 위해 노력한 이들이 존경받을 자격이 없다면 대체 누구에게 그 자격이 주어지는 걸까?
서한솔(서울 상천초등학교 교사, 초등성평등연구회 대표)
※ ‘0교시 페미니즘’ 연재를 마칩니다. 서한솔 선생님과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