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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 마나 그렇다는 그대로, 보니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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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1.jpg

감자꽃
권태응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감자꽃〉(창비 1995)

정말일까? 자주 감자를 심으면 자주 꽃이 피고, 자주 꽃 핀 밑을 파면 자주 감자가 나올까. 당장이라도 확인하고 싶어 마음이 근질거린다. 하지만 자주 감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얼마 전 경남 합천 가회면에 있는 열매지기 공동체에 들렀을 때 이인화씨(52) 집 텃밭에서 자주 감자 한 포기를 볼 수 있었다. 자주 감자가 맞느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이씨는 나를 헛간으로 데려가 대바구니에 담긴 감자알을 보여 주었다. 거둔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자줏빛이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다. 권태응어린이시인학교에 참석하는 어린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면서 몇 알 얻어갈 수 있느냐니까 열 알이 넘는 자주 감자를 봉지에 담아 주었다. 자주 감자는 흰 감자보다 단단하고 야무져서 겨울도 잘 난다고 한다.

1연과 2연은 정확히 대구를 이룬다. “자주” 자리에 “하얀”이 들어간 것만 다르다. 서른여섯 글자, 자수도 많지 않다. 쉬어갈 곳엔 쉼표가, 마치는 곳엔 마침표가 찍혔다. 읽자마자 외워져서 소리 내 읽으면 그대로 노래가 된다.

공란을 두고 모방 시 쓰기를 해볼 수 있다. ○○ ○ ○ 건 ○○ ○○,/ ○ 보나 마나 ○○ ○○.// ○○ ○ ○ 건 ○○ ○○,/ ○ 보나 마나 ○○ ○○. 공란을 조금 더 늘리거나 줄여도 좋다. ○○ ○ ○ 건 엄마 ○○,/ ○ 보나 마나 엄마 ○○.// ○○ ○ ○ 건 아빠 ○○,/ ○ 보나 마나 아빠 ○○.

“보나 마나” 앞 공란의 자수를 늘리는 것을 허용하고, 엄마, 아빠 뒤에 ‘냄새’, ‘소리’, ‘버릇’, ‘용돈’ 등을 넣어 보아도 재미있다. 엄마, 아빠 자리에 비슷하거나(메꽃/ 나팔꽃) 다른 말(고양이/ 강아지)을 넣으며 놀 수도 있다. 대구는 자수와 형식을 맞추는 것이어서 자칫하면 기계적이란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잘만 쓰면 구조적 안정감, 리듬감을 부여하여 쉽게 노래가 된다.
이안2.jpg» 지난해 열린 권태응어린이시인학교에 참가한 어린이들. 이안 시인 제공.
권태응(1918-1951)은 한국 동시문학사 100년에 빛나는 동요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감자꽃’ ‘땅감나무’ ‘북쪽 동무들’ ‘고추잠자리’ ‘또랑물’ ‘보리밭 매는 사람’ 등 37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오는 가을, 권태응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창비에서 〈권태응 전집〉을 간행할 예정이다. 이제까지 권태응은 미발굴 상태의 보물 같은 시인이었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충주시(시장 조길형)에서는 권태응동요제, 학술대회를 열고, 동시 분야 국내 최고 상금(2천만 원)인 권태응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기로 했다. 생가터 매입 및 복원, 유적지 정비와 보존, 문학관 건립도 순차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안3.jpg» 지난해 열린 권태응어린이시인학교에 참가한 어린이들과 이안 시인(왼쪽 아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안 시인 제공.
해마다 여름방학이면 충주에서 2박3일 일정으로 권태응어린이시인학교가 열린다. 탄금대 ‘감자꽃 노래비’-생가터-산소로 이어지는 권태응 문학기행, 권태응의 삶과 동시 배우기, 시 쓰기, 동시 콘서트, 시화전이 열린다. 오는 26일부터 28일까지 동시를 쓰는 열네 명의 시인이 전국에서 모인 48명의 어린이들과 함께한다. 갈수록 참여 열기가 뜨거워 채 10분도 안 되어 접수가 마감된다. 올해는 경종호, 김륭, 박해정, 송선미, 이안, 임복순, 정유경, 조하연 시인이 모둠 교사로, 나비연 시인이 노래 강사로, 김경진, 이종수, 정민, 최우 시인이 진행 교사로 참여한다. 서울교대 재학생, 초등 교사 등 8명이 모둠마다 1명씩 들어가 어린이들의 생활을 돕는다. 권태응 문학기행(26일), 시 낭독 및 시화전, 백창우와 굴렁쇠아이들의 동시 콘서트(28일)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신청 방법은 7월 7일 동시마중 카페(http://cafe.daum.net/iansi)에 공지된다.

권태응어린이시인학교에선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시인, 보조 교사 모두가 현장에서 시를 쓴다. 동료 시인들이 보는 앞에서 낭독과 전시까지 해야 하니 창작의 부담이 적지 않다. 어떤 해에는 미리 써서 몰래 가져갈까 꿍꿍이를 부려 보기도 한다. 이튿날 저녁 시화를 만드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급해진다. 시인 교사는 시인 교사대로, 보조 교사는 보조 교사대로 자기 스타일과 현장감을 살린 동시를 어떻게든 써 내야 한다. 대구로 쓴 작품 몇 편을 소개한다.

권태응시인학교
김개미(시인, 모둠 교사)

여기서는 흔한 아이스크림이
엄청 중요하다
축구공 하나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

여기서는 물 한 모금이
되게 중요하다
돌 하나가
싸움 날 정도로 중요하다

(2014년)

비석치기
신채은(충북 충주 용산초6)

공격할 때는
안 넘어갈 듯 넘어갈 때 짜릿하다.

수비할 때는
넘어갈 듯 안 넘어갈 때 짜릿하다.

(2015년)



동네 싸움
한태규(경기 수원 영일초 2)

“우리 동네가 더 커.”
라고 하면

“우리 동네가 더 커.”
라고 우겨서
싸움 난다.

(2016년)


환삼덩굴
이채희(서울 중랑 원묵초 5)

환삼덩굴은 처음 보는 사람
에게도
착! 붙는다

나도 많은 사람들
마음에
착! 인상을 남긴다

(2017년)


모둠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권태응어린이시인학교에 참가한 어린이와 교사들은 2박3일의 시간과 시인학교의 공간을 공유한다. 문학기행, 아침저녁 산책, 비석치기, 굴렁쇠 굴리기, 물놀이, 시 노래 배우기, 식사와 간식, 놀이 시간, 낯선 잠자리 등 그 과정에서 본 것, 들은 것, 겪은 것, 발견한 것, 느낀 것, 생각한 것이 자연스럽게 시에 스민다. 교사가 쓴 시에는 아이들 이야기가 나오고 어린이가 쓴 시에는 친구나 선생님 이야기가 나온다. 시인학교가 끝나면 교사와 어린이들이 쓴 시를 모아 한 권의 시집을 만든다. 어린이들은 지난 여름의 시 이야기를 가을에 우편으로 받아본다.

시 쓰는 걸 어려워하는 아이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은 큰 어려움 없이 시를 써낸다. 가끔은 깜짝 놀랄 만큼 좋아서 훔치고 싶은 시를 만날 때도 있다. 무엇보다 동시를 쓰는 시인들에겐 2박3일 동안 어린이들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되고, 어린이들에겐 책으로만 보아온 시인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권태응 선생이 후배 시인들과 어린이들에게 베풀어 준 잔치이고 선물이다. 이번 권태응어린이시인학교에선 어떤 어린이들을 만나게 될까. 벌써부터 마음이 간지럽다.

〈감자꽃〉 맨 앞에 실린 작품은 ‘감자꽃’이 아니라 ‘땅감나무’다. 땅감은 토마토의 우리말이다. 서시적 성격 탓에 키가 너무 높은 나무는 시, 땅감나무는 동시의 상징으로 읽게 된다. 아이들이 쉽게 다가와 즐길 수 있는 문학이 동시라는 의미이겠다. 이 작품 역시 대구로 이루어졌다.

땅감나무
권태응

키가 너무 높으면,
까마귀떼 날아와 따 먹을까 봐,
키 작은 땅감나무 되었답니다.

키가 너무 높으면,
아기들 올라가다 떨어질까 봐,
키 작은 땅감나무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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