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와 놀아주지 못하는 아빠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아이와 놀기만 하면 울리는 아빠도 있고, 싸우기도 한다. 때론, 놀이가 부담스러워서 일부러 퇴근을 늦게 한다. 이래저래 놀이를 경험하지 못하고 성장하는 아이들이 많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남편의 이러한 행동은 아내에게 짐으로 전가되며, 이는 독박육아의 고착화가 이루어진다. 이미 통계를 보면, 맞벌이 가정에서 아내의 가사 분담율이 70%가 훨씬 상회하고 있다. 거기에다 아이와 놀이까지 하려다보면 아내들은 파김치가 되기 십상이다.
필자는 이미 10년 전에 놀이의 달인 아빠가 되는 3가지를 발표했다.
1) 아빠의 큰 목소리
2) 헐리우드액션
3) 추임새
이다.
이 3가지만 제대로 사용하면 누구나 놀이의 달인아빠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아빠가 아이와 놀아주지 못하는 원인을 밝히다보니 14가지의 원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그 중에서 2~3가지가 한꺼번에 결합하면 놀이는 더욱 훼손된다. 그럼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진짜놀이를 하면 아이가 행복하다. 하지만 가짜놀이를 하면 아이가 울거나, 삐치거나, 혹은 기분이 좋지 않다. 이제 가짜놀이의 실체를 파헤쳐보자.
» 이미지 권규리. 제공 권오진.
1. 아빠의 목소리가 작다.
아빠의 목소리가 작으면 우선 재미가 없다. 재미가 없으면 흥이 나지 않는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아빠에게 뭔가 속상한 일이 있는 듯이 느껴진다. 아빠의 목소리는 중저음이며, 그 자체로 아이에게 심리적,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는 위대한 소리다. 이는 엄마의 중고음 소리에 비해서 쉽게 상호작용을 만든다. 그래서 놀이를 할 때, 아빠의 큰 목소리가 필요하다.
2. 헐리우드액션이 없다.
아빠와 아이가 가위바위보 꿀밤맞기 놀이를 한다. 아이가 이겨서 아빠의 이마에 꿀밤을 때렸다. 그런데 아빠는 그 순간, 표정도 없이 ‘아프지도 않네’라고 한다. 그러면 갑자기 놀이가 아니라 얼음이 된다. 하지만 아빠가 이마를 만지면서 ‘아이고 아파라. 아빠 죽는다’라고 큰 소리로 외쳐보라. 그만 아이는 박장대소를 하게 된다.
3. 추임새가 없다.
아빠가 아이와 베게 격파놀이를 한다. 아빠가 베게를 한 손으로 잡는다. 그리고 아이가 달려와서 발차기로 베게를 격파한다. 베게가 바닥에 뒹군다. 그런데 아빠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갑자기 놀이가 재미가 없어진다. 바로 추임새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가 발로 찰 때, ‘성~공’ 이라고 외치면 그 순간, 엔도르핀이 솟게 된다. 추임새는 양육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사용된다. 밥을 잘 먹지 않는 3살 아이에게 엄마가 밥을 떠먹이자 아이가 입을 겨우 벌려서 먹는다. 이 때, ‘우리 아들 잘먹네’ 가 바로 추임새이다. 놀이를 만드는 3 요소는 자극-행동-추임새이다. 위에서 떠먹이는 것이 자극이요, 아이가 밥을 먹는 것이 행동이요, 잘먹네가 추임새이다. 추임새는 일종의 성취감을 만든다. 그래서 중독성이 있다. 위에서 발로 차고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노동과 비슷하지만, ‘성공’이란 말을 하는 순간, 자신의 한 행동이 가치를 갖게 된다.
4. 아이의 눈을 쳐다보지 않는다.
아이와의 놀이가 서투른 아빠의 경우, 대부분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무의식적으로 아이의 눈을 피하고 있다. 그런데 잘 노는 아빠를 보면 눈을 수시로 마주치면서 노는 것을 볼 수 있다. 눈을 쳐다보는 것은 일종의 바디랭귀지 대화법이다. 왜 대화를 할 때, 눈을 보라는 것일까? 눈은 마음의 창이기 때문이다. 눈으로 바라보면서 서로의 감정을 주고 받기 때문이다. 그 감정은 교감과 상호작용으로 변환된다.
5. 놀이를 양의 개념으로 생각한다.
놀이의 잘못된 관념이란, 양의 개념이라고 착각을 한다. 아이와 놀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란 충분하고, 일정한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놀이의 기회가 현저하게 줄게 된다. 그런데 놀이는 양이 아니라 질이다. 1분안에 아이와의 교감이 활발하면 그것으로도 충분한 놀이가 된다. 주로 1분 안에 아이가 웃음을 빵~ 터트리면 훌륭한 놀이가 된다. 그 순간, 행복에너지인 엔도르핀이 생성된다.
6. 의무적으로 놀아주려고 한다.
무슨 일이든지 의무가 되면 수동적, 소극적이 되기 쉬운데, 이는 자기주도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아이와의 놀이를 의무적으로 놀아주는 것은 영혼이 없이 노는 것과 같다. 결국, 놀아주는 척을 하게 된다. 그러면 교감이 발생하지 않기에 흥이 나지 않으며, 재미가 없다. 놀이는 아빠의 권리이다. 놀이를 통하여 아빠의 모든 노하우를 가르쳐줄 수 있는 기회이다. 이런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능동적, 적극적이어서 웃음과 행복을 연출할 수 있다.
7. 놀이의 주도권이 아빠에게 있다.
아이가 놀아달라고 하자 아빠는 장난감박스를 가져와서 바닥에 쏟는다. 그리고 아이에게 한 장난감을 주며 놀라고 한다. 10분이 지나자 다른 장난감을 갖고 놀라고 한다. 아빠는 아이의 놀이에 수시로 참견을 한다. 그러자 아이의 표정은 경직되었으며, 마음이 상해서 놀이가 재미없다. 결국, 놀이의 주도권은 아이가 가져야 한다. 장난감을 선택하고 노는 방법을 아이가 정하고 실행해야 한다. 여기서 아빠는 단지, 보조의 개념인 도우미 역할이면 충분하다.
8. 내일, 놀아주려고 약속한다.
아이와 놀아주지 못하는 아빠들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내일아빠’이다. 아이가 놀아달라고 하면 항상 ‘내일 놀아줄께’라고 한다.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룬다. 이 말은 곧 지키지 못할 약속이다. 아이와의 신뢰가 점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아이가 놀아달라고 하면, 당장 1분이라도 놀아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멸망이 와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현실을 사랑하는 절대 긍정의 자세이다. 우리는 언어적으로 내일을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내일이란 가상의 세계이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늘, 지금, 이 순간이 있을 뿐이다. 단지, 오늘을 충실히 사는 사람에게 내일이란 희망의 오늘로 다가온다.
9. 아이와 놀아주려고 결심한다.
세상의 이치는 이상하다. 왜, 결심을 하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왜, 다이어트나 금연, 금주 결심을 하면 성공하지 못할까? 그것은 외부의 영향으로 갑자기 결심을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의 마음을 보면 겉마음은 결심에 동의한다. 하지만 속마음인 무의식은 ‘어림없어’라고 콧방귀를 뀐다. 결심을 할 때의 심리적인 상태를 보면 마음이 우선 경직되어서 억지로 하려고 한다. 특히, 갑자기 놀아주려고 결심을 한다면 명령과 수행이라는 수직적인 관계가 되기 쉽다. 놀이의 본질은 너와 나의 즐거움이다. 그러려면 우선 아빠가 아이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 친구같은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교감과 상호작용이 나오면서 행복을 만들 수 있다.
10. 아내가 놀아주라고 강요한다.
누구나 어릴 때, 학교에 갔다왔는데 엄마가 ‘공부 열심히 해라’라는 말을 듣는 순간, 머리는 이해를 하는데 마음은 거부를 한다. 마찬가지로 퇴근 후에 아내가 ‘아이와 놀아줘’라고 한다면 ’알았어‘라고 말은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이와 놀아주고 싶은 마음이 쏙 들어간다. 그것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주도적으로 행동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내가 남편에게 ‘아이가 당신을 많이 기다렸어요. 보고 싶었나봐요’라는 멘트가 더욱 설득력이 있다.
11. GO는 잘하는데 STOP이 서툴다.
아빠들이 아이와의 놀이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일은 놀다가 종료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놀이에서 GO는 잘하는데 STOP에 서투르다. 그러다보니 재미있게 놀았는데도 불구하고 아이가 울거나 삐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알람요법이다. 먼저 아이와 놀이를 마치는 시간을 정한 후에 알람을 맞춘다. 그리고 연습을 한다. 알람이 울리면 아이와 함께 만세를 부르면서 ‘끝났다’를 3번 외쳐본다. 실전에서도 마찬가지로 놀이가 끝나는 시간에 알람이 울리면 동시에 ‘끝났다’라고 외치면 쉽게 종료된다. 바로 알람소리와 외침이 환경을 바꾸는 터닝포인트가 된다.
12. 거실 놀이의 DNA가 없다.
모든 아빠들에게 거실놀이가 서툰 것에 대한 원죄는 없다. 아빠들은 아이들과 야외에서는 누구나 기본적인 놀이를 한다. 그런데 거실놀이에 접어들면 아이와 놀기가 쉽지않다. 그것은 아빠들의 마음속에 거실놀이에 대한 DNA가 없기 때문이다. 한 세대 전, 아빠들의 놀이는 주로 골목길에서 이루어졌다. 만일, 거실에서 노는 것을 엄마가 보게 되면 ‘나가서 놀아라’라며 내쫒았다. 그러므로 아빠들에게 거실놀이란 그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경험해보지 못한 장소에서의 생경함이 곤혹스럽게 한다.
13. 아빠와의 놀이 DNA가 없다.
모든 아빠들이 아이들과의 놀이가 서툰 것에 대한 원죄는 없다. 아빠들이 어린 시절, 그의 아빠는 거의 놀아주지 않았다. 그 대신 골목길이 놀이의 해방구가 되었다. 거기에 가면 언니, 누나, 오빠, 형, 동생들이 언제나 놀고 있었다. 그러면 동무들끼리 놀았다. 만일, 내가 놀고 싶은 종목이 있으면 언제나 함께 놀 수 있었다. 나이가 어린 아이라고 무시하지 않았다. 대신 깍두기 역할이 주어졌다. 누구나 그 곳에 가면 수많은 놀이를 하며 놀았다. 그러면서 놀이가 전통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전승되었다. 거기에서 아빠들이 아이와 놀아주는 경우는 없었으며, 아빠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아이가 아빠가 되었으며 아이와 놀아주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아빠의 DNA속에는 놀이란 아이들끼리 노는 것이라고 각인되어있다.
14. 스마트폰을 놀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그럼 놀이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정답은 스마트폰이다. 이미 전국적으로 유아스마트폰 중독자로 넘쳐나고 있다. 초등학생은 물론 유치원생도 스마트폰 중독증후군에 속한다. 이는 전적으로 부모의 영향이 컸다. 특히, 엄마들이 아이가 보는 앞에서 장시간 스마트폰을 하거나 혹은 아이에게 동영상을 보여주거나 게임을 시키면서 확대가 되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결국 스마트폰 중독중후군에 내몰리게 되었다. 이런 중독자가 되면 가장 큰 영향은 인성발달이 안된다. 사람교육 자체가 불가능하다. 아이들은 점점 성격이 급하게 되면서 분노조절기능이 훼손된다. 결국 아이가 스마트폰을 자주 사용하는 것은 놀이가 아니라 내 아이의 인생을 망치게 하는 자해행위이다. 부모가 정신을 차려야 중독중후군에서 나올 수가 있다.
내 아이를 잘 키우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일까? 부부의 행복에 있다. 부부가 서로 배려하고, 소통하고, 교감하고, 공감한다면 행복은 당연히 이루어진다. 아이들이란 따라쟁이다. 아이의 언어와 행동을 보면 그 부모의 모든 것을 따라한다. 우리는 관념적으로 내 아이를 잘 가르치려고 한다. 그러나 아이는 가르쳐서 배우는 것보다 부부의 일거수일투족을 배우고 따라하면서 퍼스넬러티가 형성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특히, 전국이 유아스마트폰 중독 전성시대이다. 모든 아이들이 스마트폰에 대하여 심각하게 노출되어있다. 이미 스마트폰은 우리의 문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TV중독이나 PC중독보다 훨씬 강력하다. 때론 내 아이의 뇌가 팝콘현상이 일어나면서 변형되기도 한다. 이로 인하여 아이들의 인성은 형성이 안된다. 이제 부부가 각성해야 한다. 아빠가 잘놀아주면 스마트폰 중독은 저절로 치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