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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잘 키우는 법
김경진
윌마
물을 주려면 듬뿍 주어야 해
그리고 물이 잘 빠져나가나 지켜보아야지
머물러 있으면 안 돼
베라히긴스
물은 정말 가끔 주어야 해
물이 없어도 똑똑 떨어져 뿌리를 잘 내리지
걱정하지 않아도 돼
트리얀
물이 정말 자주 필요해
뿌리만 말고 잎에도 필요하지
늘 물을 머금고 살아
호야
물이 없어도 잘 살아
물이 있어도 잘 살지
늘 든든해
너는 윌마도, 베라히긴스도, 트리얀도, 호야도 아니지
너는 얼마만큼의 물이 필요하니
―〈동시마중〉(2014년 1·2월호)
마흔다섯 살 전에는, 선인장이든 꽃기린이든 난이든 국화든, 어느 시의 제목처럼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유홍준). 마흔다섯을 넘어 오십 가까워지자 큰 애를 쓰지 않고도 식물이 되기 시작했다. 대상을, 내가 아닌 그의 입장에서 헤아릴 수 있는 것은 나이가 주는 선물인지도 모른다. 식물의 죽음은 대부분 물 주기와 관련된다. 잦으면 썩고 뜸하면 마른다. 썩어도 죽고 말라도 죽는다. 그 사이가 활로다. 제때 주지 않으면 제 몸의 물기를 빨아 먹으며 숨을 이어간다.
잎이 팽팽함을 잃거나 단풍의 기미를 보일 때다. 그때를 알아채고 물만 주어도 식물은 거짓말처럼 다시 살아난다. 무섭도록 질긴 것 같아도 돌보지 않으면 한순간에 죽어 나가는 게 목숨이다. 죽은 식물을 끌어안은 채 길거리에 나앉은 화분의 모습은 적절한 돌봄을 받지 못한 채 죽어간 목숨을 떠올리게 한다.
김경진 시인의 ‘너를 잘 키우는 법’은 윌마, 베라히긴스, 트리얀, 호야의 생리를 물 주기와 연관 지어 이야기한다. 식물 얘기이기도 하고 사람 얘기이기도 하다. 생명은 적절한 관심을 원한다. 적절함은 일정한 기준, 조건, 정도 따위에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은 꼭 알맞음이다. 그러자면 먼저 내 앞에 있는 것이 윌마인지, 베라히긴스인지, 트리얀인지, 호야인지를 알아야 한다. 윌마에게 호야의 방식을 적용하거나 베라히긴스에게 트리얀의 방식을 적용하면 낭패를 본다. 윌마라고 해서 다 똑같지도 않다. 토양과 습도, 햇빛의 양, 통풍 정도에 따라 율마는 저마다 다른 자기만의 윌마를 요구한다.
시인의 시선은 “윌마도, 베라히긴스도, 트리얀도, 호야도” 아닌 “너” 앞에서 멈춘다. 그래, 윌마도 알겠고 베라히긴스도 알겠어. 트리얀도 호야도 어느 정도 알 것 같아. 그런데 너는? 너는 언제는 베라히긴스 같고 트리얀도 같았다가 어떤 때는 둘 다 아닌 것도 같아. 또 어떤 때는 그 모두를 합친 것만큼 복잡하기도 하지. 때맞춰 물을 준 것 같은데도 네가 시들시들 시들어 간다면, 이제 나는 어떡해야 할까. 무엇을 잘못 안 걸까. 무얼 잘못한 걸까. 처방이 잘못되었다면 다른 진찰이 필요하다. 네가 무엇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너에게 꼭 맞는 관심과 사랑을 주고 싶다.
식물을 기르는 건 동물을 기르는 것과 다르다. 식물에겐 목소리가 없다. 보채고 조르는 움직임이 없다. 대신 표정이 있다. 빛깔, 윤기, 시듦을 보고 물이 지나친지 모자란지, 볕과 바람을 쐬어 줘야 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아이에게 꽃나무 하나를 책임지고 키우게 하는 것도 좋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 씨앗을 심고, 잎이 나고, 꽃대가 올라와 꽃 피우는 걸 같이 보는 그 시간을 함께 나누고 기르는 것만으로 부족하지 않다. 대신 물을 주어야 할 때, 분갈이를 해 주어야 할 때는 아이를 참여시키는 게 좋다. 식물의 표정에 반응하면서 타자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기를 수 있고, 생명 감수성도 높일 수 있다.
민들레 꽃씨와 바람권오삼풀밭에서 피어나는민들레도 있지만길가에서 피어나는민들레도 있다그런 민들레는민들레 씨앗을슬쩍 가져가던 바람이길바닥 여기저기에 흘린씨앗에서 피어난 것그래서 어떤 민들레는보도블록이나 시멘트 바닥틈새에서 피기도 한다―〈동시마중〉(2017년 9·10월호)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떤 운명은 짓궂고 얄궂게 태어난다. “보도블록이나 시멘트 바닥/ 틈새에서 피기도” 하는 “어떤 민들레”의 운명은, “민들레 씨앗을/ 슬쩍 가져가던 바람이/ 길바닥 여기저기에 흘린/ 씨앗에서 피어난 것”이다. “슬쩍”과 “흘린”이란 말에서 운명의 한 속성―장난이거나 실수, 짓궂음과 얄궂음을 읽게 된다. 이것은 이렇게 태어난 운명에 관한 말일 뿐, 그것의 절망을 가리키지 않는다. 가엾음이나 대견함의 시선도 엄격히 절제되었다. 어떤 운명은 실제로, 그냥―이유 없이 그렇게 태어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태생이 그래서가 아니라 태생이 그러한데도 어떻게든 살아간다는 것. 자세를 바로하고 이 작품을 읽게 하는 힘이 여기에 있다.
공부성명진집 안구석진 데서 발견한씨 몇 알아빠와 나는무슨 씨인지내내 궁리하다가봄이 오면흙에 심어 보기로 결정했다이 문제는봄에게흙에게 물어보기로 했다―〈동시마중〉(2018년 5·6월호)
“씨 몇 알” 놓고 “무슨 씨인지/ 내내 궁리하”는 아빠와 아이의 시간이 사랑스럽다. “봄이 오면/ 흙에 심어 보기로” 한 결정도 참 잘했다. “봄에게/ 흙에게 물어보기로”,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함께 기다리기로 한 것도 현명한 결정이다. 글도 다르지 않다. 글이 막히는 건 재주가 모자라서가 아니다. 더 삶이, 더 애씀이, 더 겪음의 시간이 필요해서다. 마흔다섯 살 전에는,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기에 네가 무엇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또 지금 필요한 앎을 알지 못한다. 글이 그런 것처럼 삶이 막히는 건 재주가 모자라서가 아니다.
그러니 때로는 질문의 방식과 답변의 주체를 바꾸어 볼 일이다. 작은 연분홍 꽃 앞에서 아이가, “이렇게 이쁜 꽃이/ 도둑놈의갈고리를 낳은 거야?” 묻는다면, “아니,/ 도둑놈의갈고리가/ 이렇게 이쁜 꽃을 낳은 거야”(이안, ‘도둑놈의갈고리’) 대답해 주자. 이렇게 이쁜 꽃이 도둑놈의갈고리를 낳은 것도 사실이지만, 도둑놈의갈고리가 이렇게 이쁜 꽃을 낳은 것도 사실이니까. 그치지 않고 이어지는 한 인생은 오직 깊을 뿐, 불우와 영화, 절망과 희망을 단언하기 어렵다. 문제는 우리가 인생에, 운명에, 그 불가해성에 어떤 지평을, 열린 틈을 제시할 수 있는가이다. “바람”의 장난이나 실수로 “보도블록이나 시멘트 바닥/ 틈새에서 피기도 하”는 “어떤 민들레”의 운명에 눈을 맞출 수 있는가이다.
김경진 시인은 2014년 〈동시마중〉 제23호에 동시를 발표하여 등단했다. 2018년 대산문화재단 창작 지원 사업에 선정되었다. 아래 작품 ‘시작을 위해’는 시작(始作) 겸 시작(詩作)에 관한 이야기다. 칠백 년, 이천 년, 삼만 년은 사람의 시간이 아니다. 전설이거나 신화의 시간에 가깝다. 그만큼 비현실적이다. 그런데 그 오랜 시간을 “기다려” 아라홍련, 므두셀라, 스테노필라가 현실 세계로 건너 왔다. 사람으로선 어떻게 해도 불가능한 시간이지만, 사람이라서 그 불가능한 기다림의 마음가짐을 닮을 순 있다. 시를 쓰는 일도, 시를 쓰며 사는 시인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어떤 시와 시인은 그렇게, 불가능한 기다림 끝에 오기도 한다.
시작을 위해김경진민들레 씨앗은 바람과 함께목화 씨앗은 포근한 솜 가운데에서접시꽃 씨앗은 책상 위 작은 접시에 담겨기다려아라홍련은 칠백 년을므두셀라는 이천 년을실레네 스테노필라는 삼만 년을 기다려꽃을 피우고 잎을 내었지그러나 몇 년 몇 십 년 몇 천 년 몇 만 년을 기다리다사라지기도 해그래도씨앗은 언제나 기다려바람과 함께바싹 말라 버린 나뭇가지에 매달려서작은 접시에 담겨서*아라홍련은 2009년 경남 함안에서, 므두셀라 대추야자는 2005년 이스라엘에서, 실레네 스테노필라는 2012년 러시아에서 싹을 틔웠다.―〈동시마중〉(2018년 5·6월호)
이안 시인, <동시마중> 편집위원 aninu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