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소리에 눈을 떴다.
전날 마신 술기운이 남아 머리가 살짝 아프다. 어제의 일이 조각조각 떠오른다.
열대의 숲, 신기한 곤충들, 빽빽한 밀림 사이로 흐르는 황토를 머금은 붉은 강물,
끝과 시작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동굴, 퀴퀴한 냄새, 바닥으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줄지어 춤추듯 날아오르는 박쥐떼,
어둠 속에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던 야생의 동물 소리.
엄마, 어디로 가는 거야? 언제까지 가야 해?
글쎄, 나도 몰라. 가다 보면 밖이 나오겠지.
엄마, 동굴이 왜 이렇게 무시무시해.
어둠 속에서 떨리는 아루 목소리가 들렸다. 세계에서 가장 큰 동굴, 말이나 사진으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크고 굉장했다.(초대형 여객기 40대가 들어갈 수 있는 크기란다.) 규모에 압도당하고 그리고 어둠 속에서 시각이 자유롭지 못하니 나도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이 동굴은 사슴 동굴(Deer cave)이야. 동굴 바닥에 소금기가 있어서 사슴들이 그 물을 먹으러 동굴에 오니까 사람들도 사슴 사냥을 하러 따라오곤 했대. 랑 동굴(Lang cave)은 이 동굴을 처음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래.
아루에게 가이드에게 들은 동굴 이야기를 해주면서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갔다.
이 동굴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어땠을까? 우리는 가이드 따라 손전등으로 비추며 다니는데, 그리고 중간에 전등이 있어도 이렇게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데, 동굴을 처음 발견했을 때는 얼마나 어둡고 무시무시했을까?
동굴 길이 2km, 어둡고 음침한 긴 터널을 지나며 수백만, 수천만 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크고 무시무시한 동굴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종유석이 1cm 자라는데 100년의 시간이 걸린단다. 가이드의 설명과 지구과학 시간에 배운 용어들을 떠올려 보지만 이렇게 큰 동굴을 만든 그 힘을, 그리고 동굴 안을 장식하고 있는 갖가지 모양의 종유석과 석순, 석주들을 만들어낸 그 세월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커튼, 해파리, 조개껍데기, 유령, 말미잘... 구불구불, 뭉텅뭉텅 석회암에 이름을 붙였다.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 유수한 세월에 걸쳐 만든 동굴 속 풍경은 바닷속 풍경이 되었다가 커튼이 내려진 무대가 되었다가 으스스한 유령들의 집합소가 되기도 했다.
사진기를 대어 보지만 조그만 프레임 속에 압도적인 규모와 분위기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좌린은 사진을 찍느라 뒤처지고 아루는 두려움 때문인지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시야에서 아루와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해람이 걸음을 재촉하며 간간이 사진을 찍었다.
가이드가 손전등을 비추자 간신히 벌레들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불빛을 내는 먼지처럼 조그만 형광벌레와 실을 길게 늘어뜨린 것처럼 보이는 sticky worm. (너무 어둡고 미미하여 사진으로 찍지 못했다!)
어디? 어디? 나도 보여줘!!!
호기심으로 가득 찬 해람이 눈에서도 불빛이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엄마, 우리가 '지구'책 속에 들어온 것 같아.
어머님이 번역하신 '와우! 지구(Wow! Earth)'는 해람이가 특별히 좋아하는 책이다. 아직 글자를 모르는 아이는 책 속의 그림이나 사진에 쏙 빠져든다. 지구에 대한 백과사전인데 펼쳐 놓고 ‘어느 사진이 마음에 들어?’ ‘나는 이거, 나는 이거!!’ 하면서 자주 놀았다.
엄마, 우리가 '지구'책에 들어와서 책이 불룩해졌겠다, 그치?
동굴 속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해람이 말처럼 우리가 책 속에 들어와 모험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토끼굴 속으로 미끄러져 내려온 앨리스가 된 기분이랄까.
누가 그렇게 이름 붙였는지, 언제부터 그렇게 불렀는지 모르겠지만, 동굴 안으로 드는 햇빛과 바깥 풍경을 보고 에덴동산 (garden of eden)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 마음에 확 와 닿았다.
에이브러햄 링컨을 닮았다고!
국립공원 본부에서 동굴입구까지의 산책로, 3km를 걸었다.
가이드의 주의사항, ‘난간을 손으로 잡지 마세요!’ 조그만 벌레들이 난간에 붙어살기 때문이다. 신기한 벌레들을 많이 봤는데 눈높이가 맞아서 그랬는지 해람이가 가장 잘 찾아냈다. 해람군 따라 숨은 벌레 찾기 시~작!
나뭇가지인가, 벌레님이신가?
털이 북실북실
다리가... 대체 몇 개야??
혹시 그냥 나무껍질 아니고??
누가 가느다란 풀 가지를 꺾어서 붙여 놓았나?
어디 숨었지?
이건 손톱보다 작았는데 해람이가 용케 찾아냈다.
박쥐.
동굴에서 나와 사람들과 함께 반원으로 둘러앉아 박쥐를 기다렸다. 낮 동안 어두운 동굴 속에 붙어 지내던 박쥐들이 먹이를 찾아 나올 거라고 했다.
대체 언제 나오나, 여섯 시에 나온다는데 정말 그러려나.
엄마, 박쥐들이 정말 여섯 시에 나온대? 동굴 속에 시계가 있나? 어떻게 여섯 시인줄 알고 나올까?
동굴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초조하게 시계를 살폈다. 아이들 말대로 박쥐가 시계를 보는 것도 아니고, 자연이란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것이지 인간의 시간에 맞추어 나타나는 건 아니잖아, 기대가 실망으로 바뀔 가능성에 대비하여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 찰나, 여섯 시 십분 전. 셀 수 없이 많은 박쥐가 떼를 지어 나타났다. 약속이나 한 듯이 한꺼번에 동굴 밖으로 쏟아져나와 줄지어 하늘을 날았다. 물론 우리 시간에 맞추어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건 아니지만, 객석에 앉아 공연을 즐기는 기분이 들었다. 기다란 뱀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도넛이 되었다가 회오리바람 혹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연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와아~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여러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와 함성이 되고 옆에 앉은 이에게 자신의 감동을 전하는 낮은 속삭임이 되기도 했다. 우리가 지나온 동굴 속에 이렇게 수많은 박쥐가 잠을 자고 있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후두둑, 후두둑
박쥐들의 무대가 먹구름으로 어두어지더니 빗방울이 쇼타임이 끝남을 알렸다. 빗방울은 순식간에 합쳐져 장대비가 되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무섭게 퍼붓던 빗줄기는 조금씩 약해지고 사방에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다.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우리를 앞질러 갔다. 낮에 신기한 벌레들을 발견하던 그 길에서 이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왁왁, 왁왁,
삐악,삐악
휘로로로롱~ 휘로로로롱~
끽끽, 끽끽
대신에 숲에서 들려오는, 동물들이 내는 온갖 신기한 소리가 우리를 둘러쌌다. 개구리? 맹꽁이? 새? 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하지만, 어둠이 짙게 깔려 구별해내는 것이 어려웠다.
왁왁/끽끽/휘로로로롱~
누가 더 흉내를 잘 내나, 누가 더 동물들과 이야기를 잘하나 내기라도 하듯 목청껏 소리를 따라했다.
흥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다리 근육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피로감도 기분 좋게 느껴졌다.
좋지? 좋지? 정말 좋지?
좌린과 아이들에게 묻고 또 물었다.
자연에 대한 신비감? 경외?
두근두근 내 가슴을 이토록 뛰게 하는 이 감정 상태를 어떤 말로 표현해낼 수 있을까? 사진이나 말로 다하지 못하는 이 벅찬 감동. 국립공원안에 있는 유일한 식당에서는 뭐든 비싸다는 걸 알면서도 맥주를 세 캔이나 거푸 마셨다.
다시, 아침.
우리에게 과분한 이 숙소는 물루국립공원 내의 롱하우스.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사라왁 주의 전통 가옥을 롱하우스라고 한다. 필요에 의해 방을 하나씩 늘려가서 집이 점점 길어져서 그렇게 부른다나. 국립공원 숙박 시설 중에 복도를 사이에 두고 방이 좌우로 4개 있는 숙소를 롱하우스라고 하는데 실제 전통가옥은 아니다.) 벽과 바닥이 나무로 되어 있는 넓은 방에 가구와 소품들도 화려하지 않으면서 자연의 느낌을 잘 살린 것이 마음에 든다. 내부도 좋지만 무엇보다 국립공원 안에 있어서 밀림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 빗소리, 새소리, 야생의 소리와 풍경들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침대에서 꾸물거리고 있는데 어느새 눈을 뜬 아이들이 내 곁으로 모여든다.
아루: 포크르르르릉, 저크르르르릉
엄마, 새가 포크로 먹을까, 젓가락으로 먹을까 고민하나?
해람 : 엄마, 엄마, 나도 해볼께, 포크르크크크.. 저크르크크크...
이제 새소리를 그냥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 의미어로 각색까지 하는구나.
밖에서 들려오는 새 울음소리에 아이들의 흉내까지 더해져 요란한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