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석의 내가 사랑한 그림책]
두드려 보아요
안나 클라라 티돌름 지음/사계절 펴냄(1993)
아이들은 반복을 편안해한다. 한번 보거나 듣고 익숙해지기엔 모든 것이 너무나 새롭기 때문이다. 리듬감 있는 반복은 아이들을 안심하게 하고, 안심 속에서 아이들은 도전을 시작한다. 부모들은 아이를 재울 때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부른다. 아이 역시 같은 책을 수십 번 반복해서 펼쳐 보면서도 늘 재밌어한다. 어른들이 생각할 때는 지겹지 않을까 싶은데도 아이들에겐 전혀 그런 기색이 없다.
반복은 뇌세포 간의 연결을 만드는 기본적인 방법이다. 아이들의 뇌는 아직 연결이 불완전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포 간의 연결이 많이 부족하다. 뇌세포 간의 연결이 생각이고, 감정이고, 행동과 절차에 대한 기억이기에 아이들에겐 더 많은 연결이 필요하다. 같은 자극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순간 아이의 뇌에선 비로소 의미 있는 연결이 이뤄진다. 충분히 반복되지 않은 자극은 그냥 사라진다. 이때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재미든, 기분 좋은 느낌이든, 반복을 스스로 찾고 즐기도록 만들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유아들이 좋아하는 그림책 역시 대개 반복을 기본 얼개로 삼고 있다. 아이들 노래가 길지 않은 멜로디에 가사만 조금씩 바꿔가며 반복되듯 아이들의 그림책도 서너 장의 그림을 단위로 비슷한 내용이 변주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더해 아이들이 친숙하게 느끼는 동물과 가족이 등장하고 아이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쉽고 선명하게 그려진 그림이 있다면 유아들은 호감을 느낀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부모와 함께 읽을 때 아이가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재미의 요소가 포함되지 않은 그림책에 아이들은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물론 그 재미란 어른들이 느끼는 재미와는 사뭇 차이가 나지만, 부모도 아이도 함께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더 나아가 마음까지 따뜻하게 한다면 그야말로 좋은 그림책이다.
안나 클라라 티돌름의 <두드려 보아요>는 유아들이 어떻게 그림책을 갖고 노는지 잘 알지 못했다면 만들 수 없는 책이다. 아이들에게 그림책은 책이 아니다. 하나의 장난감이다. 아이들은 그림책을 읽기보다는 그림책과 함께 놀고 싶어 한다. 티돌름은 현명하게도 그림책의 한 면을 텅 비우고는 손잡이를 그려 넣어 문으로 만들었다. 그 면을 볼 때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문을 두드리게 된다. 똑똑. 문이 열리듯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문 안의 방이 나온다. 파랑, 빨강, 초록, 노랑, 하얀색 문을 차례로 열 때마다 방 안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물들이 놀이도 하고 식사도 하고 잠잘 준비도 하고 있다. 그림책은 더는 부모가 읽어주는 책이 아니다. 이제 아이도 그림책을 보며 할 일이 있다. 아이에게 할 일을 주는 것은 아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아이는 자기를 인정해주는 그림책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서천석 소아정신과 의사, 그림 사계절 제공
*한겨레 신문 2014년 1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