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화의 어린이책 스테디셀러]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롤프 레티시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펴냄(2000)
» 한미화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데뷔작인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을 읽다 보면 궁금증이 든다. 1945년 이 책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어른들은 대체 삐삐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사실 삐삐는 지금 봐도 별스런 아이다. 부모 처지에서 고백하자면 삐삐랑 같이 사는 건, 물론 삐삐가 가진 금화 때문에 고민은 하겠지만, 사양이다. 특히 잘난 척하기 좋아하고, 권위를 내세우는 어른에게 삐삐는 참을 수 없이 불쾌하고 불편한 아이다. 아니나 다를까. 출간 당시 스웨덴에서도 제멋대로 거짓말을 일삼는 삐삐를 보고 사람들은 ‘신경을 건드리는 불쾌한 아이’ 혹은 ‘구제불능’ 취급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빙판길에 미끄러져 침대 신세를 지게 된 린드그렌이 심심한 나머지 딸의 생일 선물로 주려고 쓴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은 나오자마자 2주 만에 2만권 이상 팔려나갔을 만큼 환영받았다. 출간된 지 7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동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 답은 어렵지 않다. 삐삐를 만나 보면 바로 느껴진다. 동화의 내용은 삐삐가 뒤죽박죽 별장에 살게 되며 이웃집에 사는 모니카랑 토미랑 신나게 노는 이야기가 전부다. 삐삐의 진짜 이름은 ‘삐삐로타 델리카테사 윈도셰이드 맥크렐민트 에프레임즈 도우터 롱스타킹’이고, 엄마는 하늘의 천사이며, 아빠는 식인종의 왕이다. (실은 엄마는 돌아가셨고, 선원인 아빠는 폭풍우에 휩쓸려 바다에 빠졌는데 식인족의 섬에 도착해 왕 노릇을 하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게다가 삐삐는 힘이 장사이고 금화로 가득 찬 돈 가방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해 삐삐는 혼자 사는 고아다. 현실이건 동화건 부모가 없는데 행복한 아이는 기억건대 삐삐밖에 없다.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와 <빨간머리 앤>의 앤처럼 고아지만 씩씩하게 자기 삶을 개척하는 캐릭터는 종종 있다. 하지만 이 경우도 완전한 고아는 아니다. 주디에게는 키다리 아저씨가 있고, 앤에게는 매슈 아저씨가 있다.
오로지 원숭이 닐슨씨뿐인 삐삐는 부모 없는 아이들이 겪을 애정결핍이나 정체성 문제 따위는 아랑곳없이 언제나 당당하다. 한창 신나게 놀고 있는데 자라고 하거나 캐러멜 대신 약을 먹으라고 할 부모가 없으니 더 잘됐다 여긴다. 게다가 자존감도 엄청 높다. 읍내의 화장품 가게가 ‘주근깨 때문에 고민이 많으십니까?’라고 광고를 하자 다짜고짜 가게 문을 벌컥 열고 ‘주근깨 때문에 고민하지 않아요!’라고 소리친다. 주근깨조차 자랑스러운 삐삐다.
일본의 분석심리학자인 가와이 하야오는 삐삐를 ‘완전한 어린이의 세계에 있는 아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다양한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지닌, 상상이 곧 현실이 될 수 있는 완벽한 어린이의 세계 속에 사는 아이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별스럽다 여겼지만 어른과 선생님에게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삐삐를 보며 나도 모르게 속이 뻥 뚫렸다. 어른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속에 있는 말 다 하는 건, 상상 속에서나 했던 일인데 삐삐는 이걸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학교를 졸업한 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삐삐가 여전히 사랑받는다는 건 그만큼 어린이가 느끼는 억압이 크다는 증거다. 부디 삐삐가 인기 없는 세상이 찾아오길.
한미화 출판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