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있는 삶] ① 벼랑에 선 맞벌이들
배우자 있는 1178만 가구 중
맞벌이가 43% 505만 가구
야근인 아내 대신 칼퇴근하면
“진급 관심없나” “애나 봐라” 비아냥
“친정엄마 안도와주면 사표 쓸판”
장시간 노동체제 한계 다다라
지난해 통계청이 발표한 맞벌이 가구 수는 배우자가 있는 1178만가구 중 505만가구(42.9%)에 달했다. 맞벌이가 절반 가까이나 되지만, 배우자 한명에게 가사와 육아를 전적으로 맡기는 ‘외벌이 시대’의 패러다임은 변화가 없다.
회사에 오래 머물러야 ‘인정’받는 장시간 노동은 전형적인 외벌이 패러다임이다. 이는 주로 ‘야근’의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부부가 동시에 야근할 경우, 저녁에 어린 자녀들이 방치된다는 점에서 야근은 맞벌이 부부의 ‘주적’이다. 이 때문에 가장 왕성한 경제활동을 할 나이지만 영유아 자녀가 많은 30대 가구의 맞벌이 비율(40.6%)은 전체 비율(42.9%)보다 낮다.
■ 아빠의 경우
‘과거’에 머물러 있는 회사에서 ‘현재’를 사는 맞벌이 아빠들은 ‘미래’를 생각하면 퇴근이 두렵다. 어쩌다 ‘이른 퇴근’을 하려고 해도 ‘진급할 생각이 없나’, ‘여유가 많은가’라는 주변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해운사에 다니는 명철(가명·35)씨는 “아내가 야근을 뺄 수 없을 때는 내가 일찍 퇴근해야 한다. 그럴 때마다 ‘그래, 너는 집에 가서 애나 보라’는 식의 비아냥에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많다”고 했다.
수훈(가명·36)씨는 지난해 동기들이 과장으로 올라갈 때 혼자 ‘유급’됐다. “새벽에 출근해서 밤 10시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일하는 과장이 상무 눈에 들어 탄탄대로를 달리는 걸 보면, 5살 딸을 씻기고 재우는 것만이라도 하고 싶어 저녁 8시까지만 야근을 한 내가 잘못 사는 것 같다”고 했다.
박봉에 고용 사정이 열악한 이들만 머리를 싸매는 것은 아니다. 경쟁이 심한 전문직들도 고민의 수위는 비슷하다. 6살·3살 아이를 둔 종합병원 의사 서준(가명·39)씨는 퇴근이 늦는 아내 대신 일찍 퇴근할 때마다 진료과장 등 선배 의사들한테서 모멸감을 느껴야 한다. 서준씨의 아내 역시 산부인과 의사다. 산모의 상황에 따라 퇴근 시간이 엉망으로 꼬인다. “의사들의 경우 과장 직급 정도 되면 젊었을 때부터 아내가 전업주부를 하며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경우가 많다. 회식이나 행사에 빠질 때마다 직장에서 내 위치가 사라지는 것 같아 불안하다”고 했다.
한 공기업에서는 보다 못한 어느 직원의 아내가 ‘우리 남편 야근 좀 그만 시키라’는 글을 고객게시판에 올렸는데, 그 남편을 색출해 징계한 일도 있었다. 이 기업에 다니는 한 직원은 “이 직원만 아내 단속도 못하는 ‘진상’이 됐다”고 했다.
■ 엄마의 경우
5살 아이를 키우는 최선민(가명·33)씨는 지난해 회사를 그만뒀다. 주말에만 엄마·아빠 얼굴을 보는 아이는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는 등 발달이 더뎠다. 그는 “야근 대신 집에서 일을 하겠다고 했더니 50대 남자 팀장이 ‘나는 집에서 한 일은 일로 치지 않는다’고 하더라”라고 했다. 최씨는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임신 전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며 열정을 쏟았던 회사였기에 ‘배신감’은 더 컸다.
3살 난 아이를 둔 박영미(가명·35)씨는 “회사에서 유일한 여자 간부는 애를 시댁에 맡겨놓고 한달에 한번 보러 간다. 남자들은 그 간부를 놓고 ‘독하다’고 욕하면서도, 자기들은 팀 회의를 저녁 7시에 잡고 워크숍은 금·토 1박2일로 잡는다. 아이를 봐주는 친정엄마가 아프기라도 하면 당장 회사를 그만둬야 할 판”이라고 했다.
야근을 당연하게 여기는 직장에서 맞벌이 엄마는 늘 퇴출의 기로에 선다. 전문직인 민영(가명·39)씨는 “몇 번이고 그만두려고 했었다. 다행히 시부모님이 도와주셔서 버티고 있다. 주변 동료는 늦게까지 일하다 임신 6개월째에 유산을 했다. 그 동료는 ‘애 낳지 말고 살라’는 상사의 말에 결국 직장을 그만뒀다”고 씁쓸해했다.
■ 수요일만 가정의 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 연구원인 김재광 노무사는 “1970~80년대 산업화 시절의 성장모델인 장시간 노동 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노동자 개인의 삶과 가족 복지의 향상을 목표로 노동시간 단축 논리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수요일을 ‘가정의 날’로 정하는 곳이 많다. 왜 수요일만 가정의 날이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노동시간 단축을 어떤 특정한 날을 만들어 접근하면 아빠는 그날만 가족과 함께 하고 다른 날은 엄마가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한겨레 신문 2014년 10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