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를 여는 생각
스테퍼니 스탈 지음, 고빛샘 옮김
민음사 펴냄
여기 케케묵은 이야기가 있다. ‘여자는 결혼했고 아일 낳았고 모든 게 달라졌다.’ 1963년 미국에서 출간되어 이른바 페미니즘 2세대 물결을 이끈 베티 프리단의 베스트셀러 <여성의 신비>는 여자들을 아내와 어머니 역에만 안주하도록 만드는 당시의 문화를 꼬집어 ‘여성의 신비’라 했다. 아내·어머니를 칭송하는 ‘여성의 신비’ 문화가 여자의 야심은 쪼글쪼글한 노처녀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란 믿음을 확산시켜 여자들을 일에서 멀어지게 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반세기 뒤. 2000년대 중반 미국 뉴욕의 한 대학 수업에서 <여성의 신비>를 읽고 있다. 갓 스물을 넘긴 학생들에게 교수가 묻는다. “궁금하군요. 여러분의 어머니 세대는 대부분 이 책을 읽었겠죠?” 한 학생이 답한다. “할머니가 읽으셨다던데요. 엄마에겐 이미 옛날 책이었을걸요.” 교수 왈, “맙소사, 맞아요. 모두들 이 책이 까마득한 옛 이야기라고 생각하나요?”
“저는 이 책의 내용이 소름 끼칠 정도로 오늘날과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전업주부 어머니 밑에서 자란 또다른 여학생이 말했다. 맞벌이 여성에게 이중 노동의 압박이 더해졌을 뿐, ‘여성의 신비’ 이데올로기는 지금도 진행형이라고도 했다.
프리단 주장의 핵심은 여자들이 교육받고 직업을 가지면 문제는 해결된다는 거였다. 남녀가 평등해진다는 거였다.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았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많은 여성이 직업을 가진 지금, 여자는 아직도 남자와 평등해지지 않았다. 왜? <빨래하는 페미니즘>이 던지는 물음이다. 미국의 여성 언론인으로 ‘일과 가정’을 병행중인 30대 후반의 지은이는 왜 ‘페미니즘 고전’ 수업의 청강생이 되었나? 남녀 불평등이란 케케묵은 옛이야기는 왜 항상, 지금 여기의 이야기가 되고 있나?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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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맘’ 요구하는 사회, 남녀평등은 여전히 멀다
왜 다시 페미니즘이어야 하는가. ‘빨래하는 페미니즘’의 지은이는 말한다. 남자와 여자는 아직 평등하지 않다. ‘일과 가정’의 병행이 여자들에게만 요구되는 한, 평등은 멀고도 먼 길이라고.
“쯧쯧.”
대학생 시절 <빨래하는 페미니즘>(2011)의 지은이가, 페미니즘의 개척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1792)를 읽었을 때의 반응은 그랬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주장은 여자들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 여자들이 더 나은 아내와 어머니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교육받지 못한 여자는 지식과 미덕을 키울 수 없기 때문에 남자의 동반자가 될 준비를 할 수 없다.” 여자에게도 이성적 사고 능력이 있다는 그의 발언은 여자들을 모욕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남자의 동반자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는단 말인가?
20년 뒤. 후배들 페미니즘 수업의 청강생이 된 지은이는, 이십대 학생들의 틈바구니에서 울스턴크래프트를 다시 본다. 그가 살던 18세기 후반의 유럽은 “아내와 어머니가 될 운명인 여자들에게 지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믿음이 만연하던 때”였다. 그는 그런 시대에 맞서, 남성과 여성 독자 모두를 납득시키고자 결혼과 육아에 대해 얘기하면서, 진짜 하고 싶었던 말,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를 설파했던 것이다.
<빨래하는 페미니즘>(고빛샘 옮김, 민음사 펴냄)의 지은이 스테퍼니 스탈은 누구인가. 그는 1960~70년대 미국 사회를 강타한 반전, 평화, 자유 물결 속에서 남녀 평등을 몸에 익힌 세대의 아이이자, 그런 부모 아래 미국에서 19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엑스 세대’의 일원이다. 뭐든 될 수 있다고 여기며 성장한 여성이다. 스탈의 부모는, 특히 아버지는 페미니스트였다. 딸에게 “넌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고 수없이 얘기했고 가부장제의 폐해를 쉼없이 상기시켰다.
“내게 페미니즘은 혁명보다는 진화에 가까웠다. 불과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획기적이라 여겨진 여성들의 성취가 내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 지금부터 20년 전 대학 졸업식장에 선 우리 모두는 세상을 거머쥘 기세였다.”
20여년 전 대학 문 나설 땐
세상 거머쥘 기세였던 여성들
일과 가정 오가며 지쳐버렸다
출산 후 경력 어떻게 할 것인가
선택 요구받는 건 오로지 여자다
결국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보부아르에서 반발짝도 못나갔다
그랬는데, 지금 그 딸들은 어떤 현실을 살고 있나? 대학(바너드대학)을 졸업하고 언론학 석사(컬럼비아대학)를 마친 뒤 신문기자가 되었던 지은이 스탈은 아이 낳고 결혼하면서, 출산과 양육의 수렁 앞에서, 비정규직(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의 길을 택한다. 집에서 ‘일과 가정’을 병행하면서, 그는 지쳐 나가떨어졌다. 육아·가사를 남편과 분담하지만 동등한(균등한) 분담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만이 아니다. 동시대 미국의 수많은 딸들에게 벌어지는 일이다. 그의 한 친구는 그래서 이혼했고, 또 다른 친구는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결혼을 한 친구는 결혼을 후회하고 있고, 스탈 자신은 육아를 병행하려 정규직을 포기했다. “양육에 참여하는 남자들이 늘고 있다 해도 출산 뒤 경력을 이어가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놓이는 것은 오로지 여자들이다.”
여성이 직업을 갖고 일하기만 하면 남녀 평등은 성취될 것이라던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 출간 뒤 어언 50여년, “우리는 일과 육아를 동시에 완벽히 해낼 수 없다는 현실을 너무도 잘 알게 됐다. 결국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1950년대의 번쩍번쩍한 잡지 광고에 그려진 ‘행복한 (전업)주부’가 베티 프리단이 말한 유령이었다면, 1980년대 말에 등장한 ‘슈퍼맘’은 우리를 괴롭히다 그 힘을 소진하고 구겨진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또다른 유령이었다.”
슈퍼맘을 요구하는 유령은 “페미니즘을 당연하게 여기며 성장한 우리 세대를 혼란스럽게 만들”면서 이제는 아내와 어머니라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모호함을 받아들이고 타협하라고 하고 있다. 지은이는 말한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왜 다시 페미니즘이어야 하는가’를 곱씹으며 모교 ‘페미니즘 고전 연구’ 수업의 청강생이 된 이유다. 미국 출간 3년 만에 한글판으로 찾아온 <빨래하는 페미니즘>의 원제는 ‘여성을 읽다-어떻게 페미니즘 고전은 내 삶을 바꾸었나’이다. 국내에도 <여성주의 고전을 읽다>(한정숙 외 지음)라는 비슷한 제목의 책이 있지만, <빨래하는 페미니즘>의 특장은 지은이 스탈이 미국의 특정 세대에 속한 자신과 후세대, 앞세대의 생각을 씨줄날줄로 엮으며, 바로 ‘나’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대중적인 필치로 펼쳐놓고 있다는 점이다.
스탈은 존 스튜어트 밀, 버지니아 울프, 시몬 드 보부아르, 프리단을 거쳐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케이트 밀렛, 주디스 버틀러, 에리카 종, 그리고 2000년대 이라크 여성 리버벤드(필명)의 <바그다드 버닝>까지, 18~21세기 페미니즘 저작 26권의 문제의식과 고뇌를 풀어놓는다. 대부분 영미권 저작인 점, 애초 개인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을 구체화해보겠다고 했지만 정치와 국가, 사회의 역할과 이를 위해 필요한 정책 과제까지 짚지 않는 건 아쉽지만, 이 책의 주목적이 ‘페미니즘 고전 읽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재미있으면서도 깊이를 갖춘 대중적 페미니즘 입문서다.
오늘을 사는 삼십대 후반 미국 여성이 제기하는 물음들은 놀랍도록 오늘 한국 여성들의 현실과 닮았다. 그 한 예가 육아휴직이다. 남녀의 고용 평등 및 일·가정 양립을 위해 도입된 이 제도는 2014년 현재, 대부분 여성이 이용하고 있다. 그마저도 육아휴직 가능 여성 10명 중 1명만이 썼지만, 무엇보다도 전체 육아휴직자 중 남성 비율은 3.3%에 불과하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의 왕국(=평등의 왕국)에 안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들은 아직 절반밖에 가지 못했다”고 썼다. 그런데 잠깐, 보부아르가 이 글을 쓴 건 1949년이 아니었던가. “교외 시가지가 확산되고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열리고 시민 평등권 운동이 펼쳐지고 1·2세대 페미니즘 운동이 시작되기도 전이었다.” 우리는 아직도 보부아르의 시대에서 반발짝도 전진하지 못했다. 책을 닫으며 지은이는 단호한 어조로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그녀가 나이며 내가 그녀다. 우리는 함께 다른 인생이 만들어놓은 지도를 참조해 우리의 발자국을 앞뒤로 더듬으며 현재의 우리를 만들 것이다. 여기, 이곳에서.”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한겨레 신문 2014년 10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