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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석의 내가 사랑한 그림책] 기다려주기 믿어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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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석의 내가 사랑한 그림책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
존 버닝햄 지음, 이주령 옮김/시공주니어 펴냄(1996)

존 버닝햄 그림책의 가장 큰 매력은 아이들을 믿는 마음에 있다. 그는 아이들의 내면에 힘이 있으니 아이를 믿고 기다리라고 이야기한다. 영국의 유명한 대안학교인 서머힐 출신다운 그의 철학이다. 그에게 두 번째 케이트 그리너웨이 상을 안겨준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를 보면 그의 철학이 분명히 드러난다.

검피 아저씨의 배에 동물들이 하나씩 올라탄다. 검피 아저씨는 동물들이 타는 것을 허락하면서 한 가지씩 주의할 점을 말해준다. 하지만 동물들은 지키지 않는다. 고양이에겐 토끼를 쫓아다니지 말라고 했고, 강아지는 고양이를 괴롭히지 말라고 했고, 말에게는 뒷발질을 하지 말라고 했건만 어느 한 녀석도 지키지 않는다. 결국 배는 뒤집히고 모두 강에 빠지고 말았다.

중요한 것은 여기부터다. 물에서 나와 강기슭에서 몸을 말리는 동물들에게 검피 아저씨가 말을 건넨다. 무슨 말일까? “그것 봐라. 아저씨가 조심하라고 했지. 다음부터는 그러면 안 돼.” “꼴좋다. 이런 말썽꾸러기들. 이제 다신 안 태워줄 거야.” 우선 생각나는 말은 이 정도다. 하지만 검피 아저씨가 한 말은 전혀 달랐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자. 차 마실 시간이다.” 아저씨와 동물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과자와 따뜻한 차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검피 아저씨는 다시 한마디 한다. 다음에 또 놀러 오라고.

아이들도 이미 경험을 했다. 아저씨 말 안 듣고 장난을 쳤더니 고생하는구나. 그럼 된 것이다. 아이 스스로 이미 배웠는데 거기에 대고 말을 보탤 필요는 없다. 차라리 따뜻한 한마디가 낫다. 나는 언제나 너희 편이라는 마음을 보여주는 말. 그런 말에 아이들은 더 많이 움직이고, 더 깊게 깨닫기 마련이다.

존 버닝햄은 아이들은 아이들이라고 말하려 한다. 소란을 피우는 것도, 엉뚱한 일을 저지르는 것도 아무 문제 없다. 그저 아이의 모습일 뿐이고 그 모습 그대로 소중하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를 믿어야 한다. 그 믿음 속에서 아이들은 성장한다. 물론 아이들이 사는 현실은 결코 만만치 않다. 위험한 일도 많다. 존 버닝햄은 그럴수록 아이들에겐 오직 행복을 주자고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줄 수 없는 행복을 가져다주자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아이들의 모험을 인정하고, 아이가 상상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란다. 자기만의 개성을 지닌 어른이 된다.

서천석 소아정신과 의사
서천석 소아정신과 의사
존 버닝햄은 믿음의 작가다. 어찌 보면 이 시대의 부모에게 가장 결핍된 미덕이 그에게 있다. 그 미덕으로 인해 일부 부모들은 그에게 열광하고, 다른 일부는 못 미더워하며 그의 책을 낮게 본다. 하지만 아이들은 안다. 이 그림책이 자기편이라는 것을. 검피 아저씨의 배에 올라타는 동물들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 배에 타도 되냐고 부탁할 때의 동물들의 표정은 왠지 기죽어 보인다. 하지만 배에 올라탄 후 동물들의 눈은 초롱초롱 빛난다. 존 버닝햄의 책을 들여다볼 때도 아이들의 눈빛은 한없이 반짝인다. 이 책이 자신을 믿어준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 정도를 그림책이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그림책에 바랄 것은 없다.

서천석 소아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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