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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석의 내가 사랑한 그림책] 우리 아이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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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석의 내가 사랑한 그림책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
권정생 글, 이담 그림/보리 펴냄(초판 1980)

또 전쟁 이야기. 그저 한심할 뿐이다. 삼백만이 넘는 사람이 죽어간 전쟁이 끝난 지 육십 년이 지났다. 두 세대가 흘렀고 이 땅에 사는 사람 대부분은 전쟁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도 틈만 나면 현실로 비집고 들어와 자신이 근처에 있음을 알리곤 한다. 물론 이 땅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전쟁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 아니 애써 무시하며 산다. 전쟁보다 더 골치 아픈 걱정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런 걱정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포탄 한 발에 먼지처럼 흩어지고 말 것이다.

다행히 큰 위기는 지나갔다.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고 한마디씩 보탠다. 하지만 지난 며칠간 남북한의 수십만 젊은이가 군화를 신은 채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부모는 잠들기 어려웠다. 외국의 유명 예측 기관에 의하면 전쟁이 날 경우 이 젊은이 중 절반이 세상을 등질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부모는 죽을 가능성이야 그보다 낮겠지만,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죽음과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방송들은 큰 목소리로 전쟁 이야기를 떠든다. 두려움보다 흥분이 느껴진다. 그 목소리에 질려 내가 펴든 그림책은 권정생 선생의 글에 이담 씨가 그림을 그린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다. 그림책은 꽃이 피는 산기슭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스름한 산기슭에서 잠자던 오푼돌이 아저씨가 깨어난다. 그보다 조금 먼저 곰이도 일어났다. 한가로운 풍경 속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하지만 이들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죽은 영혼이다.

곰이는 전쟁 중 피난길에 폭격을 맞아 죽었고, 오푼돌이 아저씨는 인민군으로 복무하던 중 쏟아지는 총탄에 생을 마쳤다. 이들은 원한이 있어 이승을 떠날 수 없다. 유령처럼 혼이 되어 땅에 머문다. 삼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귀에서는 피가 흐르고, 죽음의 기억은 생생하다. 왜 이들은, 아니 이 땅의 삼백만이 넘는 영혼은 죽은 것일까? 무엇을 위해서 싸웠고, 무엇을 얻으려고 목숨을 버린 것일까? 인민군이던 오푼돌이 아저씨는 이야기한다. 인민을 위해서 싸웠지만 정작 죽어나간 것은 인민들뿐이었다고. 나라를 위해서 싸운 국군도 결국 제 나라를 쑥밭으로 만들었다고.

서천석 소아정신과 의사
서천석 소아정신과 의사
권정생 선생은 우리 민족이 힘이 없어 외세에 휘둘리고, 서로 믿지 못해서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하고야 말았다고 이야기한다. 전쟁의 책임과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비극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이 있을 수 없다. 전쟁은 그리 쉽게 결단할 것이 아니다. 수백만의 삶, 수백만의 세계가 창졸간에 사라지는 일이다. 사라지고 그 원한에 이 땅을 떠나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 전쟁이다. 육십 년이 지나 희미해진 듯싶지만 여전히 이 땅엔 피냄새가 배어 있다. 그래서 전쟁 이야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또 나오고, 폭력은 생활 깊숙이 들어와 일상을 지배한다. 그 피냄새가 더 짙어져선 안 된다. 아이들과 이 그림책을 읽어야 할 이유다.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 추천.

서천석 소아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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