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에 선 지가 엊그제 같은데 35년 6개월이 지났으니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합니다. 아울러 그간 정든 교단을 떠나며 교육의 의미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얼마 전 리처드 도킨스의 명저 <이기적 유전자>를 읽었습니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노르만 왕조의 시조인 정복왕 윌리엄 1세(1066년 잉글랜드 정복)의 직계 후손이 틀림없지만 윌리엄 1세의 유전인자 ‘진’(gene)을 한 개라도 가졌을 가능성은 0%라고 합니다. 부모 양쪽에서 반반씩 ‘진’을 물려받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진’이 자녀에게 부모의 특성 가운데 일부를 전달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신장, 피부색, 얼굴 생김새, 혈액형 등이 부모의 어느 쪽을 닮았는지 가늠할 수 있지요. 조부모나 증조부모의 특성이 점점 희미해지기는 하지만 부모가 자녀에게 ‘진’의 일부를 전달하지 않을 수는 없지요. 그리고 우리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진’의 일부와 자신이 진화시킨 ‘진’의 일부를 또 자녀에게 전달하지요.
도킨스에 따르면, 이러한 ‘진’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또한 문화적 유전인자 ‘밈’(meme)을 전달한다고 합니다. ‘밈’은 도킨스가 ‘흉내’ 혹은 ‘모방’이라는 뜻의 희랍어 ‘미메메’(mimeme)에서 따와 처음 만든 말인데요. ‘진’이 부모를 통해 생리적으로 전달되는 것이라면 ‘밈’은 주변 사람들의 언어와 행동을 ‘따라함’으로써 머릿속으로 전달되는 문화적 유전인자라고 할 수 있답니다.
주목할 점은 우리의 생각이나 행위가 의식적으로 ‘배워’ 이루어지기보다는 훨씬 많이 무의식적으로 그냥 ‘따라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영국 사람이 ‘따라함’으로 영어를 익혔듯이 우리는 ‘따라함’으로써 우리말을 익혔지요. 문화권에 따라 사람들은 ‘따라함’으로써 절에 가기도 하고, 교회에 가기도 하고, 모스크에 가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부모, 친구, 이웃, 교사의 생각이나 행위를 따라합니다. ‘진’처럼 ‘밈’도 쉼 없이 전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 자신의 방식으로 진화시킨 ‘밈’을 자녀, 친구, 이웃, 그리고 제자에게 전달합니다.
오래전에 한 선배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아이들은 담임 따라가요.” 그리고 한 해가 끝나갈 무렵, 1반 아이들은 1반 담임선생님을 닮아가고, 2반 아이들은 2반 담임선생님을 닮아가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담임선생님의 긍정적인 ‘밈’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밈’까지도 그대로 물려받고 있었지요. 자녀가 어쩔 수 없이 부모의 ‘밈’을 물려받듯이, 학생들은 교사의 생각이나 언행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교사로 지낸 세월을 새삼 되돌아보게 됩니다. 저도 모르게 제자들에게, 그리고 선후배 선생님들께 전달했을 ‘밈’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긍정적인 것이었을까 부정적인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이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섞여 있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제자들과 선후배 선생님들께는 밝은 ‘밈’을 좀 더 많이 전달했더라면 하는, 진한 아쉬움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이제 교단을 떠나며 이러한 아쉬움은 소망으로 변합니다. 우리 학교의 교정이 좀 더 밝고, 좀 더 긍정적인 ‘밈’이 오가는 터전이 되길 바라는 소망으로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밝은 ‘밈’을 통해 우리 사회에 더욱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간 도와주신 선후배 선생님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학생 여러분도 힘찬 기상으로 자기 꿈을 이루는 일에 정진하길 빕니다.
신동술 서울 상문고 퇴임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