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에서 얻은 빨강, 천대받던 파랑…
판화가 남궁산이 쓴 ‘색의 문화사’
19세기 독일 화가 안톤 폰 베르너가 그린 ‘보름스 회의의 마르틴 루터’(1877년). 검은 옷을 입은 루터가 자신을 탄압할 목적으로 열린 보름스 회의에서 당당하게 의견을 밝히고 있다. 종교개혁을 주도한 루터는 타락한 가톨릭교의 상징이었던 빨간색을 혐오해 개신교도들은 검은 옷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명을 담은 팔레트
남궁산 지음/창비·1만2000원
고대 로마에서는 빨강과 파랑이 혼합된 보라색은 ‘황제의 색’이었다. 카이사르는 보라를 자신을 상징하는 색으로 삼고, 아무나 보라색 옷을 입을 수 없게 했다. 네로는 아예 자신 외에 보라색 옷을 입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 보라색이 만들기가 어렵고 귀했기 때문이었다.
보라색은 기원전 1600년경 오늘날의 시리아 지방에 살았던 페니키아인들이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지중해에 서식하는 ‘무렉스 브란다리스’와 ‘푸르푸라 하에마스토마’ 등 여러 종의 고둥에서 보라색 염료를 뽑아냈다. 고둥이 극소량으로 분비하는 무색의 점액을 오랫동안 달이면 노란색을 띠는 염료를 얻는데, 이것으로 직물을 염색한 뒤 햇빛에 말리면 처음에는 초록으로, 그다음에는 빨강으로 변했다가 마지막에는 보라가 된다. 보라색 1g을 만들려면 고둥이 약 1만 마리가 필요했다니 다이아몬드보다 더 비싼 색일 수밖에.
선인장에 붙어 있는 벌레 ‘코쿠스 칵티’를 채집하는 멕시코인을 그린 18세기 말 그림. 16세기 초반 에스파냐는 멕시코 아즈텍족을 정복해 ‘코쿠스 칵티’에서 빨간색 염료 ‘코치닐’을 추출하는 제조법을 얻어냈다.
보라색 중에서도 빨간색이 더 많인 섞인 자주색은 초창기 기독교 예술작품에서 예수가 입은 옷 색깔이기도 했다.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이탈리아 라벤나의 산비탈레 성당 천장에는 천사와 가톨릭교 성인들로 둘러싸인 예수, 그에게 공물을 바치는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황후 테오도라가 자주색 의상을 입은 모습이 모자이크로 묘사돼 있다.
<문명을 담은 팔레트>(창비청소년문고 23)는 판화가 남궁산이, 빨강부터 검정까지 대표적인 9가지 색들과 인류가 함께해온 과정을 살펴본 색 안내서이다. 선사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색이 지닌 의미, 색을 얻기 위한 노력, 색을 알아보는 원리 등을 다양한 사진과 그림으로 설명한다. 이를테면 고대 이집트에서 빨간 염료로 쓰였던 ‘케르메스’는 직물 10㎏을 염색하는 데 원료인 ‘케르메스 일리키스’라는 벌레 14만 마리가 필요했다. 따라서 중세 농민들은 영주에게 이 벌레를 소작료로 바치기도 했다. 또 오래전부터 서양에서 노랑은 경계와 멸시를 상징해서 중세 기독교 회화에서는 예수를 배반한 유다의 옷을 노란색으로 채색했고, 독일 나치스는 유대인에게 노란색 ‘다윗의 별’ 배지를 가슴에 붙이도록 했다. 또 경상북도 포항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547호 ‘뇌성산 뇌록산지’는 궁궐의 단청에 쓰이는 우리의 전통 초록색으로서 일제강점기에 제조법이 소실된 ‘뇌록’의 원료 광물을 캐던 곳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화가 얀 반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1434년). 부인 조반니 체나미라가 입는 초록색 드레스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당시 초록색은 부유한 상인 계급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우리의 오방색과 음양오행의 원리, 고대 로마에서 ‘미개인의 색’으로 취급됐으나 중세에 성스러운 색으로 격상한 파란색, 초록색 안료 ‘셸레 그린’을 즐겨 썼던 화가 세잔과 모네, 마네 등이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냈던 까닭 등 색에 얽힌 당대 사회의 비밀을 밝혀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대표작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1666년). 소녀가 머리에 쓴 터번의 파란색 안료는 금보다 더 비쌌던 ‘울트라마린’이다. 유럽 상인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캐낸 청금석을 갈아 만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