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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베이비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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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기구는 없지만 놀이가 있는 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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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_6.jpg» 귄터 벨치히의 뒷동산 놀이터. 사진 편해문.놀이터 디자이너 귄터 벨치히는 1941년생으로 76살의 할아버지다. 나는 해마다 그를 찾아가 놀이와 놀이터에 대해 묻고 공부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는 아내와 아들 내외와 함께 독일 뮌헨 근교 농촌 마을에 깃들여 살고 있다. 얼마 전에도 나는 그를 찾았는데, 오늘은 그가 사는 집 뒷동산에 30년간 가꿔온 놀이터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놀이터에도 수명이 있다. 애써 당대의 기술과 미학, 그리고 주민과 어린이들의 요구를 반영해 만들더라도 그 실제 수명은 5년에서 7년을 넘기기 어렵다. 그 세월이 지나면 놀이터는 낡게 되고 고장도 나고 도색도 벗겨진다. 예산이 있으면 새롭게 리모델링을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그대로 두어야 한다. 도시의 놀이터는 그런 운명을 가지고 있다. 운이 좋게 리모델링이 되면 앞서 있었던 놀이터의 기억과 추억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산뜻한 놀이터가 들어서기도 한다. 이런 놀이터의 짧은 생의 주기를 떠올리며 놀이터를 만드는 일에 함께하다 보면 한쪽 마음이 아련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낡았지만 오래된 놀이터의 안정감은 금방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귄터 벨치히가 30여년 동안 가꾼 놀이터가 묵직하게 다가오는 것일 테다.
0405_2.jpg» 귄터 벨치히의 뒷동산 놀이터. 사진 편해문.
귄터의 놀이터에는 아이러니와 모순과 성찰이 녹아 있다. 그는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세계를 무대로 1만5천개의 놀이터 디자인과 설계에 직간접으로 참여해온 장인이다. 또한 놀이터에 들어가는 기술적인 놀이기구나 놀이시설을 수없이 디자인한 엔지니어이기도 하다.
0405_1.jpg» 귄터 벨치히의 뒷동산 놀이터. 사진 편해문.
올해도 그랬지만 몇해 전 그의 뒷동산 놀이터에 처음으로 들어섰을 때의 혼란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가 오랜 시간 가꾼 놀이터이니 온갖 놀이기구와 시설이 빠짐없이 자리잡고 있는 매혹적인 공간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새로운 놀이터를 볼 것이라 기대하고 들어선 그의 놀이터에서는 놀이기구와 놀이시설을 찾을 수 없었다. 놀이기구나 놀이시설이 있는지 없는지로 좋은 놀이터인지 그렇지 않은지 가르려는 것이 아니다. 놀이기구가 필요한 맥락에서는 놀이기구를 놀이터에 넣어야 한다. 그러나 놀이기구가 놀이터의 장식으로 쓰이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다.
0405_3.jpg» 귄터 벨치히의 뒷동산 놀이터. 사진 편해문.
그의 놀이터에 동네 아이들이 와서 노는 것을 보았다. 귄터의 놀이터는 아이들이 진정 놀 수 있는 곳이었다. 뛰고 숨고 찾고 오르고 내리고 매달리고 기어오르고 쌓고 허물고 미끄러지고 뛰어내리고 웃고 떠들고 소리 지르고 불 피울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이 가능한 언덕과 골짜기와 마당과 오솔길과 큰길과 숨을 곳과 오를 곳과 내달릴 곳과 넘어질 곳과 뒹굴 곳이 고루 자리잡고 있었다. 귄터의 놀이터는 그렇게 아이들의 놀이 욕구에 충실한 장소였다.

귄터는 왜 정작 자신의 놀이터에 그가 오래도록 만들고 개발한 놀이기구와 놀이시설을 넣지 않았을까. 나는 그것을 성찰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나라 놀이터에 지금 필요한 것은 예산이 아니라 놀이터에 대한 성찰이다.
0405_4.jpg» 귄터 벨치히의 뒷동산 놀이터. 사진 편해문.

0405_7.jpg» 귄터 벨치히의 뒷동산 놀이터. 사진 편해문.

0405_5.jpg» 귄터 벨치히의 뒷동산 놀이터. 사진 편해문.
편해문 놀이터 비평가 hm1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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