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모두 내 꽃
김미혜
옆집 꽃이지만
모두 내 꽃.
꽃은
보는 사람의 것.
꽃 보러 가야지 생각하면
내 마음 가득 꽃이 환하지.
하지만 가꾸지 않았으니까
잠깐 내 꽃.
―〈안 괜찮아, 야옹〉(창비 2015)
동시에 꽃만큼 자주 등장하는 소재도 드물다. 보통명사인 ‘꽃’을 제목으로 내건 작품뿐만 아니라 고유명사인 진달래, 개나리, 꽃다지, 냉이꽃, 제비꽃, 민들레, 목련, 벚꽃, 할미꽃, 감꽃, 감자꽃, 채송화, 메꽃, 나팔꽃, 봉숭아, 달맞이꽃, 해바라기, 코스모스, 들국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꽃이 동시의 소재가 되어 왔다. 작아도 눈에 띄고, 화려하면서도 단정미를 잃지 않고, 어린이와 성년과 모성의 이미지를 다 갖고 있으며, 고난을 인내하며 결실로 나아가는 성장의 서사와 결합하기에 더없이 좋아서이겠다.
이 시는 첫마디부터 올차고 다부지다. “옆집 꽃이지만” “모두 내 꽃”이란다. 왜? “꽃은/ 보는 사람의 것”이니까. 옆집 주인이 들었더라면 애써 심고 가꾼 정을 훌쩍 도둑맞은 느낌이겠다. 가꾸지 않은 입장에서는 이런 소유의 이전이 은근히 즐겁다. 가졌더라면 끝내 갖지 못했을, 갖지 않고 갖는 법을 선물받은 느낌이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 보면, 꽃을 가꾼 이의 마음도 모두를 향해 슬며시 열려 있는 듯하다. 아침저녁 공들여 가꾼 꽃을 내 꽃이라 주장하지 않고 ‘내 꽃이지만 모두의 꽃’이라고, “꽃은/ 보는 사람의 것”이라고, 모두에게 “잠깐 내 꽃” 하라며 슬쩍 내주는 것 같다. 갖지 않고 갖는 기쁨과 갖고서 갖지 않는 즐거움이 모두 담긴 작품이다.
꽃이 들어 있는 동시를 찾아보자. ‘감자꽃’(“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은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 권태응의 꽃이다. ‘진달래꽃’은 여전히 소월의 꽃이고, 개나리꽃은 이원수(“개나리꽃 들여다보면 눈이 부시네”)와 임길택(“길에서/ 우는 아이 하나 만났다.// 개나리꽃 속에 숨어도/ 안 보일 만치/ 아주 작은 아이였다.”)을 떠올리게 한다.
‘꽃 시’는 시인이 심고 가꾸어 모두에게 나누어 준 ‘꽃씨’이다. ‘내 꽃’, ‘우리 집 꽃’을 정해 꽃씨나 모종을 구해 심고 가꾸어 보자. 씨앗을 묻고 새싹 올라오는 것, 잎이 돋고 줄기가 서고 꽃대 밀어 올리는 것을 같이 보자. 정성껏 가꾼 ‘내 꽃’이 ‘우리 집 꽃’이 되고 이웃과 나누는 ‘모두의 꽃’이 되는 시간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은근히 기쁘고 즐겁다.
꽃과 함께 ‘나의 꽃말’, ‘우리 집 꽃말’을 찾아 길러 보아도 좋다. 식물이나 동물만 자라는 게 아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은 헛말이 아니다. 잘만 기르면 말도 자란다. 뿌리가 내리고 꽃이 핀다. 꽃말로 만든 가훈에서는 향기가 맡아진다. 평화, 사랑, 열정, 진실, 수줍음처럼 한 단어로 된 꽃말이 대부분이지만, 드물게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꽃말도 있다.
우리나라 특산인 미선나무 꽃말은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이다. 나는 그걸 ‘여섯 시 내 고향’을 보다가 알았다. 미선나무 축제를 보도하던 리포터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순간, 나는 누운 몸을 일으켜 바르게 앉았다. 당장이라도 미선나무를 구해 와 마당에 심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슬픔이 사라지는 게 좋기만 한 일일까? 슬픔 하나는 잘 말려서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언젠가 미선나무를 심게 되면 가지 하나를 잘라 잘 간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 며칠 안 되어 장을 보러 집 가까운 대형마트에 갔을 때다. 계산대 옆에 여러 봄꽃이 진열되어 있었다. 특이하게도 꽃 이름 옆에 꽃말도 같이 적혀 있었다. “꽃기린: 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 미선나무의 꽃말과 짝이 되는 말이었다.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 마치 세상이 나에게 이 두 꽃의 문장을 붙여 당장 시를 써 내라고 명령하는 것 같았다. 시보다는 동시로 써서, 어린이들 곁에 이 꽃말을 놓아주고 싶었다.
“엄마, 꽃집에서 적어 왔어”
꽃이 좋아 가끔 꽃집에 들르는 아이가 종이에 적어 온 꽃말을 엄마에게 들려준다. 이 아이는 누굴까. 사월의 아이다. 사월의 아이가 전해주는 꽃말이기에 제목이 ‘사월 꽃말’이다. 미선나무 꽃말은 따로 떼어 ‘사월 꽃말 2’로 적었다.
사월 꽃말
이안
엄마, 꽃집에서 적어 왔어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이건 미선나무,
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
이건 꽃기린.
둘을 붙이면,
모든 슬픔이 사라진 다음에도
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
엄마, 우리 이 말 기르자
사월 꽃말 2
이안
미선나무를 심을 땐,
가지 하나를 잘라
갖고 있자
모든 슬픔이 사라지면
안 되니까
슬픔 하나는,
잘 말려서 갖고 있자
―〈동시마중〉(2017년 7·8월호)
김미혜 시인은 지금까지 세 권의 동시집을 냈다. 꽃의 시인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꽃을 좋아하고 꽃 동시를 많이 썼다. 그렇다고 꽃만 찾는 건 아니다. 현실의 모순에도 강단 있게 응전하며 그것을 동시로 쓰는 시인이다. 첫 동시집 〈아기 까치의 우산〉(창비 2005)에서 한 편 더 소개한다. 지하철에서 아주머니가 이고 있는 장미, 백합, 안개꽃 꽃단은 꽃일까, 짐일까. 물음표가 오래 남은 질문이다.
꽃 짐
김미혜
아주머니가 꽃단을 이고
지하철에 탔습니다.
장미, 백합, 안개꽃
빠꼼 얼굴을 내밉니다.
신문지로 둘둘 싼 꽃에서
출렁 꽃향기가 날아옵니다.
장미, 백합, 안개꽃
꽃일까요?
짐일까요?
아주머니는
커다란 꽃단을
머리에 이고
터벅터벅
계단을 올라갑니다.
이안 시인, 〈동시마중〉 편집위원 aninun@hanmail.net